우리나라가 선비의 도를 강조하는 나라라면 일본은 무사도를 강조한다.
무사라고 하면 무식하고 잔인한 점만 생각하는데 하루의 일과를 보면 선비와 무사는 비슷하다.
아침형 인간들이며 일찍 잠을 자며 서책을 놓지 않는다. 또한 문화적 소양이 넓기 때문에 당대의 지배 이념을 장악하고 피지배자들로 부터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둘다 몰락의 길을 가는데 그 몰락의 원인은 같은 것 같으면서 다르다. 둘다 무시하던 상인계급의 자본이라는 금력이 지배를 하게된 사회상과 생산적인 일보다는 소모적인 일에 종사하던 이들은 쇠락한다
특히 일본의 상인들은 일본의 경제를 지배하고 칼을 잡고 있던 무사들의 힘은 반대로 약화되고 정치의 흐름이 일본의 덴노 (일왕) 를 중심으로 뭉치게 되지만 우리나라는 왕의 힘은 약화되고 억지로 권력을 잡으려 했을 때 그 때 벌써 세상은 너무나 부패했고 농민은 고통에 빠진다.
일본의 무사의 대표적 집단인 사무라이는 12세기 가마쿠라 막부로 부터 시작하여 무로마치 막부 마지막으로 도쿠가와 막부로 종결된다. 무려 8세기 동안 일본의 실권은 쇼군이라는 실권자와 그를 뒷받침하는 지방영주들과 사무라이에 의해 유지되었다.
조선의 양반이 과거를 통해 형성되었다면 일본엔 과거가 없었으므로 각 지역의 영주를 보호하던 무사들 즉 사무라이가 형성되며 이들의 전술은 주로 말을 타고 활을 쏘던 전법이었다.
그러나 몽골의 침입은 단병접전 (백병전) 으로 전술의 변화를 주게되는데 알다시피 몽고군이 침입할 때 같이 출동한 군인들은 고려군들이었으며 당시 고려는 무신정권이 막을 내린지 얼마 안된 시점이었고 당시 그림을 보면 일본군과 접전하는 고려군을 볼 수 있는데 아마 여몽연합군의 전술은 일본군에게 큰 변화를 주며 이 후 사무라이들은 무시무시한 '칼'을 전면에 내세우게 되었던 것 같다.
또한 평원에서 뿐 아니라 산속에서도 전쟁을 하다 보니 검술은 더 발달하고 산악의 무사가 난립하게 되고 이를 전국시대라고 하며 그전 까지 일본은 혼란기였고 몽골이 침입한 이후 부터 농민도 고통을 받게되고 결국 이들은 해적이 된다.
당시 해적은 고려나 뒤를 이은 조선 바다 건너 명의 두통꺼리였고 이 사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명의 조선출병을 우려한 조정의 결정이 세종 때 '쓰시마 토벌'로 해결되는 듯 했으나 실제로 이것을 잠재운 이는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히데요시라고 본다.
아무튼 대륙으로 눈을 돌린 일본의 침략에 앞장을 선 사무라이들과 이 후 종전이 되고 전쟁으로 권력을 잡은 도쿠카와 이에야스사이엔 질서가 형성되어 일본 계급의 상층에 사무라이가 그다음엔 농민 그리고 수공업자 마지막으로 상인으로 지배체제가 고착화 되며 사무라이들에겐 미국에 개항될 때 까지 황금기가 찾아온다.
이들은 여유있는 생활 속에서 일본문화를 이끌었고 현재 일본인들의 생활속에도 녹아 있는 검도, 궁도, 유술 (주지스)의 발달을 가져왔다.
상무적인 일본문화의 상징 사무라이 그리고 무사도 중세유럽의 기사도와 유사하기도 하지만 일본 나름의 문화로 자리잡은 이 정신은 자칫 군국주의와 함께 자신의 몸을 기꺼이 내던지는 생명경시로 연결될 수있다.
일본은 형식적 군대가 없지만 자위대라는 군대가 있고 대부분 군을 모를 것 같지만 대전을 겪은 이들 중엔 군대와 전쟁이라면 백안시 하는 세력도 있지만 그들의 핏속엔 800년 이상을 칼의 지배하에 있던 상무적 문화와 대륙으로 향하던 야욕이 잠재되어 있다. 총칼이 아닌 문화와 자본으로 다시 반도를 넘어 대륙으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쓸데 없는 기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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