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이야기

6.25사변당시 무기가 빈약했던 원인

lkjfdc 2022. 10. 2. 09:49

6.25가 일어날 당시 우리군엔 전차가 한대도 없었고 전투기 또한 없었고 해군에는 국민의 성금으로 구입한 백두산함이라는 전투함이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미군이 쓰던 무기만 주고 최신형 무기를 주지 않아 북한의 강력한 화력과 전차 그리고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 한다.




문제는 당시 10여만의 국군은 징병제를 실시한지 얼마 안된 상태였고 육군의 대부분 병력들은 경무장한 보병연대였으며 기갑연대가 있긴 했으나 바퀴가 달린 장갑차가 장비되었었고 이 부대는 훗날 수도사단 일명 맹호부대의 기간이 되어 지금은 막강한 전차가 있다.

6.25당시  화력을 담당하는 포병대대는  전방에 배치된 1사단 7사단 6사단 8사단 그리고 옹진반도 다음으로 포병학교 교도대 정도에 있었고 후방인 2사단 3사단 5사단엔 이것도 없었다.





북한이 정부수립전 군대부터 창설했고 해방직후 군에 필요한 기간요원들의 교육이 남한에 비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워졌으며 소련의 지원과 함께 중국에서 넘어온 세력들까지 가세한다.

이들의 일부는 남쪽으로 파견되어 국방경비대와 경찰을 괴롭히며  북한은  인구에 비례해  많은 유능한 인력들이 군대에 모인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지만  당이 군대를 장악하며 전체주의적이며 군국주의적인 군대로 성장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1948년 8월15일 국방경비대가 국군으로 변화하면서 병과교육이 늦게 이루워진다.


통신이나 헌병학교가 있긴 했으나 군의 주력은 아니었다. 특히 일본육사 출신 신태영 장군의  아들 신응균은 일본 육사를 나온 포병소좌출신으로 군사영어학교를 입학하여 장교가 되지 않고 진명여학교에서 수학교사를 하다 군에 입대하는데 박정희는 신응균을 선배로 존경한다.

신응균은 포병과 병기병과를 성장시키는데 힘을 기울이며 장군이 된다.

당시  육군의 대부분의 부대가 보병부대,  보병부대도 미군처럼 제병과의 협조가 있는 부대가 아닌 경찰예비대 수준으로 구식 소총이 주요 무기였고 소총중대를 지원하는 화포중 가장 큰 구경의 박격포가  81mm였고   사단포병은 미군의 보병연대에서 쓰던 105mm(M3)견인포를 운용했는데 장비도 많지 않아 5문을 1개 중대(포대)로 편성했으나 이 대포를 운용할 병력이 부족해  서북청년단 같은 탈북청년들을 입대(생계와 연결)시키고 기존의 병력과 합쳐 1개 연대정도를 가까스로 만든다.

장교들 또한 병과교육을 미고문관에게 받지만 실력이 안되고 적성에 맞지 않아 다시 보병으로 복귀를 한다.

지금이야 사단에 포병여단,전차대대,공병대대,통신대대,방공중대  같은 기술이 기반이 된 부대를 만들 수 있는 교육받은 자원이 있지만 6.25전 우리군대에 모인 병력으로는 전차를 주고  중포를 지원해줘도 이것을 운용할 병력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교량과 도로 상황은 무거운 전차가 다닐 상황이 아니었고 미군들은 그 상황을 알기에 지원해 주는데 소극적이었다.


6.25는 학생으로 일상을 보내던 중학생(지금의 고등학생)들 대학생들을 군인으로 만들고 이들이 포병이나 전차 공병 통신 화학병과 같은 부대의 기간이 되고  대부분 농촌출신의 젊은이들은 공교육의 경험이 적음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최전방 소총중대에 많이 배치가 되며 군대에서는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국민기본교육을 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공민학교를 만들며 행하기도 하며 장교들의 경우 미국이나 가까운 일본의 주일미군부대에 가서 보수교육을 받으며 이들은 이 과정에서 인맥을 형성한다.




건군시기 반란사건과 공비토벌로 인해 군대의 전투부대의 전력보다는 헌병(당시엔 군기)이나 정보계통에 인력들이 모이기도 하는데 이러한 모습은 강한 군대를 만드는 것과는 거리가 있고 권력에 의지하는 정치군인들을 만들고 군을 허약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신생독립국의 시작이 삐걱거리게 된데엔 분단  이전의 식민지 경험과 왜곡된 정책 그리고 일본의 대규모 침략전쟁과 민족말살통치에 원인이 있고 그리고 북한에 집중한 병참기지화 정책(평양, 원산, 함흥, 청진, 신의주, 진남포등  공업도시의 성장)으로 인한 남한이나 북한의 전통적 도시와 차이 발생 그리고  학교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이 제대로 이루워지지 않았고 이것도 지역격차가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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