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합천과 창녕의 낙동강 전선

lkjfdc 2022. 9. 7. 13:16







낙동강은 영남의 젖줄이기도 하지만 전쟁이 났을 때 격전이 벌어진 장소였다.

가까이는 6.25전쟁도 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격전의 장소였다고 한다.

큰집이 있던 동네도 그 난리를 피할 수 없었는데 바로 옆이 낙동강과 황강의 합류지점이 있고 더 아래엔 창녕과 합천으로 향하는 유일한 다리인 적포교(시골에선 적교라고 불렀던 것 같다. 6.25당시 다리는 끊어진다.)를 사이에 두고 북한군과 미군은 더 치열하게 싸운다.

적포를 지나 아래로 가면 의령방향이며 격전지로 유명했던 박진 나루(전설의 고향에도 등장)가 있고 더 가면 진주가 나온다.

반대쪽이 창녕의 남지로 평야가 발달한 지역이다.


북한군은 2사단(사단장최 현 소장)이 미군측은 2사단(사단장 카이저 소장)이 낙동강 특히 낙동강의 돌출부를 놓고 8.31~9.9일 미군의 대규모 폭격이 행해지고 합천과 창녕에서 북한군은 창녕의 이방면과 유어면 그리고 창녕군 소재지까지 일부가 치고 들어가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낙동강 서쪽으로 후퇴한다.

당시 북한군은 합천으로 전차를 대동하고 보병부대와 쳐들어 왔으나 미군의 맹폭으로 주저 앉는다.

큰집이 있던 동네는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논과 밭이 있는 전형적인 시골이었는데 당시 폭격을 피해 뒷산(부수봉과 성산사이 계곡위의 양지바른 암석 동굴)으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북한군병력들은 낮엔 자다가 밤이면 낙동강으로 갔다 살아오지 못한 경우가 있었고 가끔 미군들이 잡혀와 억류되어 있었다고 한다.

면소재지엔 탐진 안씨와 완산전씨, 광주 노씨들이 많이 살았고 시골동네엔 연안차씨와 우리 성주이가들이 많이 살던 집성촌에도 전쟁의 공포와 피해는 심했었고 특히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런 것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대대로 살아온 남쪽의 집들은 마당도 넓었는데 북한군은 집을 처음엔 뭔가 증서를 주고 사용을 했지만 후에는 상황이 나빠지자 뒤산의 대숲에 숨어 미군의 폭격을 피했다고 한다.



바로 지금 쯤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임진왜란 당시엔 지역의 의병들이 낙동강과 황강의 합류지점 근처인 삼학리에서 싸웠고 말정에서도 싸웠다고 한다.

지금은 합천댐이 생겨나고 합천보가 생겨 주변의 모습이 변했지만 과거엔 모래가 쌓인 퇴적지가 많아 논과 밭을 일구고 살았는데 강주변은 상습침수지구라 흉년이 드는 경우가 많았고 육로가 발달하기전 배로 다녔기에 나루가 발달했었고 지금 교통량이 많은 적포교는 일제 강점기인 1935년대 건설이 완료되고 현재의 다리는 1980년 초반 다시 만들었다.

하상교통은 중단되었지만 지명에 남아 있는 흔적을 보면 도진취락(나룻터 취락)이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 시골에선 말정이라고도 한다.
삼악이 아니고 삼학지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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