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의 시작(손원일)과 공군(최용덕 장군)의 시작엔 나름 임시정부와 관련된 인사가 있었지만 물론 대부분은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다.
그러나 주력인 육군의 경우 군사영어학교와 남조선 국방경비대를 탄생시키고 미군정 아래서 기반을 만든건 이응준과 원용덕 그리고 신태영 같은 일본군 만주군 출신이며 이들과 관련있는 인맥이 젊은 군번 1번인 일본군 출신 이형근 (이응준의 사위 ) 그리고 일본군 신응균(신태영 아들 국군포병의 아버지)이며 정일권(참모총장) 백선엽(최초의 육군대장), 신현준(해병대 창설) 이주일, 이한림, 김백일 등 만주군( 신경군관, 봉천군관학교) 출신이며 만주군관학교 , 일본육사, 국방경비대 사관학교(육사2기) 세 학교를 두루거친 이가 박정희이다.
특히 박정희는 3학교 만주 일본 한국에 두루 인맥을 형성하고 비교적 늦은 나이 생도가 되었지만 우리문화의 정서상 나이를 무시 못하고 실세를 무시하지 못하기에 그리고 인맥관리와 함께 사람들과의 친화력으로 오족협화를 강조하던 만주군관학교 선배였던 정일권 백선엽에게 대우를 받고 훗날 총리 그리고 장관으로 임명을 하며 일본육사 출신인 이용문(검찰 이건개의 아버지이며 박정희가 존경하던 인물 그리고 쿠테타를 모의 했으나 사고사)그리고 신응균을 선배로 존경하며 훗날 신응균은 국방과학연구소를 세우는데 일조한다.
박정희 본인도 독립운동을 했다거나 광복군을 했다거나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권력을 잡고 대통령이 되니 알아서 포장하고 왜곡하는 자들에 의해 일본의 패망전후 마치 독립된 정부를 위해 준비한 군인으로 묘사되어 본인도 민망하게 생각한다.
신응균이 있기전 포병사령관은 만주군 출신 장은산이 있었으나 6.25전 물러났고 주로 이북에서 월남한 청년들이 당시 육군 포병의 주축이 된다.
또한 박정희는 대령시절 병과를 전환하는 과정에서 육군포병학교와 미육군포병학교에서 인맥을 형성하며 사단포병사령관이 되고 후에 사단장도 역임을 하며 군의 실세가 되고 5.16의 기반이 된다.
그다음 임시정부나 광복군과 관련된 이범석 류동열이나 송호성 그리고 김홍일등이 있고 그리고 최용덕, 안춘생등도 있으나 상징적인 자리에 앉았을 뿐 실세는 아니었고 그외 독립군이나 광복군 출신들은 병력이 적었기에 해방된 조국의 군대에 참여했지만 적었다.
일본군 출신들 중 채병덕이 권력자의 선택을 받아 총참모장(참모총장) 도 되고 그와 친했던 이종찬도 최고의 자리에 앉지만 이승만대통령의 지시를 거부해 해임된다.
대신 원용덕이나 김종원 그리고 김창룡 같은 이들이 독재자를 도와준다. 특히 김종원은 훗날 경찰 수뇌부가 되고 김창룡은 암살을 당하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만주군 출신이었던 전략가 강문봉 중장이 군복을 벗는다.
건군시 각지역에 부대가 창설될 때도 일본군 출신의 역할이 컸고 그나마 일본군을 거쳤지만 학병장교출신들은 위의 장군들 보다 영향력은 적었지만 '김종오' 같은 춘천 6사단 백마고지에서의 공을 세우며 '한 신'이나 그밖의 많은 이들이 건군기 장교로 임관하여 이름을 떨친다.
그 이후 현장에서 이름을 날린 채명신 그리고 정승화 등은 일본군이나 만군출신이 아닌 경비사관학교(육사) 출신이고 군경력과 계급에서 영향력에서 떨어졌지만 실력을 인정받고 우리사회의 좋은 점이자 단점인 인맥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관계를 만들어 유지했다.
물론 대한제국시기 마지막 사관생도로 일본육사에 가서 일본군 장교로 남아 있던 김석원 이나 일본군에서 별을 단 영친왕 이 은도 있었고 고급장교가 된 일본육사 출신 황족 이 우도 있었다.
또한 일본군을 탈영해 만주에서 무장 독립운동을 한 기병장교 출신 김경천 같은 인물도 있었다.
헤이그특사로 갔다 귀국하지 않고 투쟁을 했던 이위종 선생이나 유한양행을 세운 류일한 선생도 늦은 나이지만 무장독립운동에 관한 훈련을 했고 그를 미국에 데리고 가서 영향을 준 지사가 철원출신 박용만 선생으로 무장투쟁을 미국에서 준비했고 중국에서 활동을 한다.
수모를 겪다 북한으로 넘어간 김원봉이 대한민국에서 기반을 잡았다면 국방관련하여 큰 일을 했겠지만 일본군 출신과 만군출신의 견제와 그리고 경찰들의 압박으로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북한 또한 찬일파를 많이 배제시켰으나 해군과 공군에서는 이들을 등용했고 중국이 공산화 되자 이들 중 조선족들은 압록강을 건너와 북한군이 되고 소련의 기계화 장비들이 보내질 때 재소교포들 또한 북한으로 들어와 전력을 확충하며 6.25 동란시 거침없는 진격을 하며 남과 북의 비극은 극에 달한다.
군에 일본군 그리고 만주군 출신을 쓸수 밖에 없던 이유는 그리고 이들중 북에서 내려온 이들이 두각을 나타낸 점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농업사회의 특성상 정규학교 교육을 받은 이들이 적었고 남한에 살면서 고등(대학)교육이나 중등교육을 받은 이들의 경우 자신의 기반이 남한사회에 어느 정도 있었기에 해방이후 군을 세우는데 협조할 필요가 없었으며 북에서 내려온 이들중 정규교육을 받은 이들이 경제문제와 사회기반을 다지는데 군을 이용했고 이들은 이곳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다.
그리고 휴전이후 이남출신과 이북출신과의 세력다툼은 5.16쿠테타와 연결이 된다.
지금은 그것이 많이 완화되었지만 6.25가 진행중에 육군사관생도를 모집했을 때 영남출신이 많았던 이유(당시 인구분포도 영향을 주었지만 전시상황이다 보니)로 군 지휘부의 인적영향력이 특정지역 출신으로 형성되고 정치권력까지 편중된 경향이 있었고 이것은 신군부 쿠테타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광복이 된지도 반세기가 훨씬 넘었고 군사력이 강화된 것도 수십년이 흘렀다.
문제는 이것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가치관이 중요하고 이들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태도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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