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재일 한국인 역도산

lkjfdc 2021. 11. 16. 13:57





일본의 패전 이후 절망하던 일본인들에게 강한 이미지로 TV에 비친 프로레슬링 선수이자 프로모션 그리고 만능엔터테이너로 사업가로 다양한 활동을 하던 거대한 인물이 연말 술에 취해 야쿠자 조직원과의 다툼에서 칼에 찔려 병원에서 치료를 하다 사망을 했다.

그의 죽음은 칼에 의한 상처보다 다른 치료중 의료사고라는 설도 있고 그의 행보를 부담스러워 하던 세력이 개입되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역도산... 일본식 발음으로는 리키도잔, 별명이었고 , 일본이름 '모모타 마츠히로'함경남도 홍원군 용원면이 고향이며 3남3녀의 막내로 본명은 '김신락' 집안의 형제들은 기골이 장대하고 인근에서 알아주는 장사였고 씨름대회에서 그의 형은 소를 여러번 받아왔고 신락 또한 씨름을 하여 성인들이 나오는 조선일보 주최 씨름대회에서 어린나이에 3위를 하여 상으로 옷감을 받아온다.(1등은 그의 큰형 김항락)

1940년 일본인의 눈에 들어 일본으로 건너가 중국 초한지 항우의 이야기에 '역발산'이라는 글이 나오는데 큰 힘을 갖고 스모를 하던 그는 재일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느끼다 그만 두고 건설현장을 전전하다 프로레스링을 알게 되어 한 실업가의 도움으로 하와이로 건너가 '프로레슬링'을 배워 미국본토로 가서 다양한 선수와 겨루고 프로레스링의 경기체계 그리고 흥행에 대한 연구를 하여 일본에 돌아온후 미국과 여러나라의 레스링 선수들을 불러들여 잘 짜여진 프로그램과 쇼맨십으로 당시 열광적인 경기를 선보여 '프로레스링' 바람을 일으키며 TV방송에 경기를 소개하면서 현장관람 뿐 아니라 길거리 전파상 그리고 안방에서 사람들을 들뜨게 한다.

이는 라디오에서 TV로 넘어 발전하는 당시 일본의 상황을 나타내고 관련 산업이 발전하는데 큰 기여를 한다.

일본프로레스링 협회를 만들어 쓰모나 유도 그리고 가라테 그리고 권투를 하던 선수들도 모이게 하지만 흥행하는 프로레스링에 반발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고 재일조선인이라는 소문이 돌긴 했지만 '큰 덩치의 미국선수'들을 현란한 기술과 함께 가라데춉(당수)으로 보내버리는 그의 모습에서 패전국 국민의 울분을 토해냈고 그를 더 일본인으로 믿고 싶어 했던 일본인들은 그를 더 의지하고 기대하게 된다.

이름과 이미지를 보면 엄청난 거구일 것 같지만 176cm 정도에 100kg 내외의 체격으로 스모나 프로레스링 선수치고는 큰 체격은 아니며 긴타이즈를 신어 다리를 길게 보이게 하고(일설엔 다리에 물린 흉터 때문이라고 한다.) TV 카메라 각도를 조절하여 이미지화 했다고 한다.

그러나 엄청난 체력훈련을 하고 가라테의 기술을 '최영의'로 부터 배워 일본식 무도(가라테가 정확히는 오키나와 것)를 혼합하고 박치기라는 우리식 격투기? 그리고 현란한 동작은 관중을 열광시키는데 부족함이 없었고 미국선수에게 당하고 있을 때 뛰어들어 제압하는 모습이 일본 열도를 흥분시켰고 가끔 쇼라고 해서 반응이 식으면 실제 경기를 선보여 무서운 분위기가 되거나 엽기적인 모습의 레슬링선수를 초대해 엄청난 경기를 선보였다.

각종 관광사업과 스포츠사업 그리고 연예계 진출 당시 발달하는 도쿄와 주변에 개발사업을 전개하여 수많은 돈을 벌어 사업가로서 유명해지고 정치인들 재벌과 연예인까지 수많은 이들과 인맥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의 사업은 일본의 일반사업과는 거리가 있고 검은돈과 유흥가 그리고 야쿠자 조직과도 관련이 있고 이 야쿠자 조직은 재일조선인들과 관련이 있었고 그들중에는 정건영이나 양원석 같은 사람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거류민단 뿐 아니라 당시 대한민국 정부와도 연계가 되고 훗날 한일 수교를 추진한 군사정부와 연계가 된다.

반대로 이들과 대척점에 서있는 조총련 또한 역도산의 고향이 북한인 것을 이유로 그의 가족과 연결을 짓고 민단쪽과 관련된 힘겨루기에서 역도산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던 것 같다.


일본에 있으나 두개로 분단된 한국의 현실에서 일본에서도 세력을 나눠 갈등하는 틈에서 역도산은 꽉 막힌 행보를 보이기 보다는 여러가지 모습으로 영향을 행사한다.

북에 남아있던 딸이 국가대표 농구선수가 되고 일본에 왔지만 상륙을 못하고 배에서 상봉을 하는 일도 있었고 일본에 정박하는 북한의 배를 보면서 아픔을 달래고 또한 대한민국 문교부장관의 초대를 받아 찾아온 자리에서 유창한 우리말을 잊은 것 처럼 행세하나 분단의 현장 판문점에서는 북녁 하늘에 대고 울분을 토했던 경우도 있었다.


북한의 통치자 김일성에겐 고급 승용차를 선물하는데 (당시 경제회복에 대한 감사도 있었지만 북한가족에 대한 부탁의 선물) 역도산의 가족들은 북한에서 대우를 받으며 대한민국 정부와 체육계에도 자신의 역량과 영향력을 발휘하여 도움을 주고자 했다.


그러나 많은 인기와 영향력이 있던 '역도산'은 그를 평상시 적대시 하던 야쿠자 조직원과의 시비로 칼을 맞게되고 응급조치와 함께 사후 대처를 적절히 하지 못해 1963년 겨울 갑자기 죽게된다.


일본인들은 그가 일본인이길 원했고 북한은 그를 민족의 영웅으로 대하기도 했으나 그의 경제력과 인맥을 활용하기 위해 조총련의 조직을 동원했고 대한민국 또한 그의 도움과 영향력을 이용 일본과의 관계개선 및 우리나라 체육계의 발전과 함께 산업발전에 도움을 받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인으로 살아간 역도산은 재일 조선인의 차별과 냉대를 일찍 알았고 돈의 힘이 외로운 이방인의 힘이며 철저히 연출되고 꾸며진 삶을 추구했었다.

사생활을 그리 편안하지 못했고 북에 두고온 가족과 일본에서 재혼한 부인 그리고 자식들 그리고 이혼과 재혼등 불안한 삶과 함께 운동선수지만 자신의 체력관리에 문제가 생겨 갈등을 했었고 일본주류사회와 재일동포사회 사이에서 힘들어 했던 인물이다.


강한 모습과 늘 이길것 같은 영웅 역도산 그러나 분단조국을 안타깝게 바라 보면 살아간 뒷모습은 너무나 아프지 않았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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