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쿠테타가 일어났을 때 혁명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당한 이들은 우리가 잘아는 청와대 경무관 곽영주 장관이었던 최인규 영화로 유명했지만 정치깡패였던 임화수(본명 권중각) 그리고 최백근(사회당 조직부장)등이 있었고 신문사 사장이었던 조용수라는 인물이 있었다.
다른 이들이야 부정선거와 총격명령 같은 죄명이 있었으나 최백근 부장과 조용수 사장은 그와 관련이 없는 인물이었다.
4.19가 터진 해 이승만의 하야와 함께 사회는 평화통일론이 고개를 들었다.
당시 민족일보가 창간이 되었으며 이 신문은 통일문제를 이야기 하고 불우한 독립운동가들을 찾아 보도하고 돕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힘든 농촌의 현실을 사실보도 했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에 취한 경제 원조를 비판하고 출범한 장면정부의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을 제정하고자 하자 조용수는 적극 동참했다.
그리고 퉁일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때 나온 구호가 '가자, 북으로 ! 오라, 남으로! '였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조용수는 좌익성향을 갖은 용공인사로 여겨질 수 있으나 진주 대곡면이 고향인 그의 집안은 부유했고 작은 아버지가 신문사 사장과 자유당 핵심이었으며 다소 우익인사에 가까웠다.
진주중학교를 다닐 때 좌익학생과 마찰을 빚어 대구 대륜중학교로 전학을 갔고 고 이만섭의장과 동기동창으로 연희전문에 입학했었다.
일본으로 가 메이지대학을 다니고 거류민당 기관지에서 논설의원을 했고 재일교포북송을 적극반대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진보당 당수 조봉암 사형사건은 그를 변화 시켰고 반 이승만 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군사정부는 그의 사실보도와 자신들 특히 박정희의 과거전력의 노출 또한 미국의 신뢰(좌익전력의 은폐를 위한 통일세력 압박)를 받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조용수를 제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당시 조용수와 연관된 사람 중 이영근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간첩이라는 혐의가 있었으나 1990년 정부로 부터 조총련 투쟁과 재일동포 법적지위 향상에 노력했다고 훈장을 받았다.
훗날 무죄로 명예회복은 이루워 졌으나 격변기 군사정부의 정책과 방향이 다르다고 신문사 사장을 사형시킨 경우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고 이해 못할 일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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