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6.25가 발발한지 68년 되는 날이었다.
막강한 지상군과 항공기로 선제공격을 한 이 전쟁에서 초기 대응에 있어 당시 정부는 속수무책이었고 한강이북의 병력들은 후퇴할 수 있는 퇴로마져 차단당한다.
이는 병력들 뿐 아니라 국민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친다.
훗날 도강파냐 비도강파냐 논란이 생기고 갈등을 만들어 낸다.
그런 사건이 있기전 대한민국 해군은 1949년 미국에서 백두산 함이라는 최초의 전투함을 사고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에서 3인치 포를 장착 1050년 4월 진해에 입항하며 당시 주요도시를 순방한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배이기도 했지만 미 해양대의 실습선으로 쓰였는데 Ensign Whitehead라는 해군장교의 이름으로 명명되어 있었고 우리군이 지은 백두이라는 이름의 뜻이 같았다.
당시 해군장병 및 가족의 모금과 정부의 지원으로 산 5만 달러짜리 중고였지만 당시 우리군과 정부의 의지가 담긴 장비였다.
6월 25일 밤 부산 앞바다에 출동 당시 나타난 미식별 선박을 보고 정선명령을 했으나 도망을 가자 추격을 했고 새벽 쌍방교전을 해 침몰을 시켰는데 당시 배에는 600여명의 무장병력이 있었다고 한다.
전투과정에서 안타깝게도 두명의 해군 승조원 전병익 중사와 김창학 하사가 전사를 했다.
만약 북한의 무장선박이 부산항이나 인근의 항포구에 상륙했었다면 안그래도 불리한 초기 전세가 더 악화되었을 것이며 부산을 통한 병력의 증원과 병참지원은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 해군은 6.25일이면 대한해협에서 전승기념행사를 개최하며 당시 백두산함의 마스트와 3인치포는 해군사관학교에 남아 있고 당시 전사자의 흉상과 전승비는 부산중앙공원에 있다.
'군대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전 계급장 (0) | 2018.07.19 |
---|---|
기무사와 계엄선포 (0) | 2018.07.08 |
일본에서 판다는 우리국군의 음식 (0) | 2018.06.25 |
30여년 전 군의 명예선언 (0) | 2018.06.13 |
군 부상자에 대한 예우 (0) | 2018.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