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이야기

낮았던 군인의 봉급

lkjfdc 2024. 3. 26. 12:22

지금은 직업군인들의 봉급이 공무원 봉급보다 많다고 하지만 초과 근무가 많고 퇴근 이후에 마음대로 이수지역을 나갈 수 없고 휴일에도 부대근처에서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또한 초급장교나 의무복무를 마친  부사관들의 경우 의무복무만 채우고 군을 떠나 소방관이나 경찰같은 직업을 하기도 한다.

소방관이나 경찰 또한 군조직과 비슷한 계급사회이고 힘든 훈련이 있음에도 떠나는 건 아무래도 덜 통제 받고 민간인들을 상대하고 변화하는 사회에 맞게 가족을 책임지고 근무지 이동이 적은 점도 있고 시간외 근무수당이 군에 비해 많은 부분도 있다고 본다.


1950년대 군인들 봉급을 보면 당시 쌀값을 기준으로 영관장교는 쌀 한가마니 위관장교는 그것도 안되고 하사관과 병은 더 심하다.

현재와 다른 건 장군과 말단의 봉금차이가 작은 편이긴 하지만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생활을 하던 군인들 특히 영외거주하고 가정이 있는 이들에게 지급되는 급여치곤 적은 돈이다.


물론 세계에서 가장 못살던 나라이고 미국의 원조를 받던 형편이니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겠지만  지휘관이나 고위직 장교들이나 부대 살림을 하던 하사관들의 공급횡령이나 군수품 유출 같은 불법이 횡횡했을 것이고 군의 차량이나 병력들을 이용 돈을 버는 일도 많았다고 본다.

단속을 하는 조직이 있고 이것을 피하려 서류를 조작하고 휴가를 많이 내보내 남는 식량과 보급품을 빼돌리는 이들도 있었고 부대 지휘관이 아닌 기행부대나 교육기관에 근무하는 직업군인들은 퇴근이후 산에 나무를 하러 다니거나 집안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전쟁이 난 원인을 보면 구조적인 비리와 횡령이 있을 수 있는 구조이고 전쟁이 이후에도 이런 문제는 정신교육이나 의식개혁으로 해결되기엔 어려웠고 결국 군 상하간의 불만 그리고 사회에 대한 불만으로 쿠테타를 실행하게 한다.

군 뿐 아니라 공무원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며 집에 어느 정도 재산이 있거나 여유가 있는 사람들 빼고는 생활하기 어려운 급여로 인해 많이 힘들었고 70년대가 지나고 조금씩 나아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아버지도 직업군인으로 복무를 하셨는데  우리집의 세간살이는 나무로 만든 궤짝 3개(엄청 무거웠음)와 이불 그리고 곤로와 밥솥 그리고 그릇 몇개  찬장과 목공을 하던 분이 만들어준 책상 한개가 전부였던 것 같다.  나중에 재봉틀을 샀고 발판을 타고 놀았다.


아버지도 군작업복 이외에 따로 옷이 몇벌 없으셨고 어머니는 70년대 중반까지 보따리 장사를 하셨다.

집에서는 닭이나 개를 길렀었고 돼지도 길었으나 읍내로 이사가면서 처분을 했다.

그 후 작은 양품점과  어린이 서점을 하셨는데 길게 가지 못했다.
팔지 못한 어린이 책이나 그림책은 내차지가 되었다.

식당도 잠깐 했었지만 자본금이 적어서 쉽지 않았고 예나 지금이나 지역에서 장사를 하려면 부조금이 많이 나갔다.


이사를 여러번 다녔고 어떨 땐 1년에 한번씩 갔다.

74년도 고장난  TV가 들어오고 75년도엔 바꾸었고 면세품으로 냉장고 세탁기가 들어오면서 좋아질 즈음 아버지는  퇴직을 하고 시골로 이사를 하면서 어려워 진다.

냉장고는 되팔고 세탁기도 사라진다.  중학교 때 부터 학비가 비싸지던 시기 도시로 다시 나가면서 시골살 때 보다 더 어려워 지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른들의 고생도 적지 않으셨던 것 같다.

돌아가신지 어머니는 17년 아버지는 시간이 15 년이  넘었는데  경제적인 안정이 조금 더 오래 지속되었다면 더 오래 계시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휴가 때면 큰 집 제사에 참석하시는 게 유일했고 여행은 아랫녁 친인척집 방문하는 게 전부였던 시절 ...

친인척이 아래 그리고 많이 떨어져 있다보니 경부선과 구마고속도로를 통해 긴 여행을 일년이면 한 번씩 다녔던 것 같다.

시골에 내려오니 농사짓는 집이 아니다 보니 신기하게 바라보고 월부로 산책이 많이 있었다.

특히  집에 몇 개 없던 가전제품을 이웃에선 부러워들 하셨는데 그때 우리집은 많이 어렵고 힘들었다.

단 힘든 농사일이나 노동을 하지 않아 시골에 살던 또래들이 힘든 것을 이해 못했고  그러다 보니 철이 없었던 부분도 있었다.



중학교 이후의 생활은 많이 바뀌었고 힘든 일을 하거나 어려운 일자리를 서툴지만 하려고 했고 세상의 다양한  모습을 보려고 했던 것 같다.


이사를 많이 다니면서 지역에 대한 편견을 바꾸려고 했고 귀촌을 먼저 했기에 지역사회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음을 알았고 생활비 또한 생각보다 많이 든 다는 것  때문에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는 한 곳에서 살기로 했고 친족이나 외척에 기대거나 지역의 인맥을 안다고 해서 도움을 받거나 깊이 개입하려는 생각은 더더욱 없다.

언제든지 아버지가 '짐싸!'하던 시절이 갔고 이젠 이사 안하고 한곳에 살았으면 하는데 쉽지는 않다.


어려운 시기 고생만 하다 가신 어른들이 더 생각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