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라는 건 남의 나라를 먹어서 지배한다는 뜻이 아니고 자국의 국민을 이사 보내서 그 나라에 '이식'을 하는 개념이다.
일본의 경우 우리나라에 국권을 강탈하고 일본인들은 자신들 자녀를 위해 학교를 만든다 . 그리고 이 학교들은 사회의 높은 자리에 오르는 통로가 된다. 그 당시 서울 뿐 아니라 전국의 도시에 공립중학교와 공립고등여학교를 만든다.
조선인은 고등보통학교와 고등보통여학교를 다녔으며 실업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이것도 학비가 많이 들고 촌락에 살던 이들은 숙식을 해야 했기에 입학을 하는 건 쉽지 않았다.
다음으로 소학교 입학이 많지 않았고 이 소학교라는 것도 초기에는 시군구 급에만 1곳인 경우가 많아 입학이 제한되어 있었고 소득이 적은 사람들이 갈 수 없던 곳이었다.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인에 비해 중등교육을 받는 건 엄청난 노력과 경제적인 여건이 있어야 가능했다.
또한 일본 본토도 중등교육과 초등교육의 학생 숫자는 차이가 컸다고 하며 조선은 더 컸다.
그리고 당시 중등교육은 일반화 되어있지 않았고 남자들의 경우는 사회적 '지위상승이나 기술자'가 되는 과정이었고 여자는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 목적이었다.
초등학교 재학의 비율도 지금과 비교하면 적었지만 중등학교는 병목현상이 발생하듯 감소했고 일반 군소재지에도 많지 않았고 있어도 실업학교인 경우가 종종 있었고 아무나 갈 수 있는 학교가 아니었다.
일본이 만주사변이나 중일전쟁에서 숫자가 많은 중국을 이길 수 있었던 건 교육받은 청년의 숫자와 비율에 있어 압도적이었고 조선 또한 그 차이가 커서 군인으로 자원입대를 하거나 징집을 당할 때도 조선인의 입대비율은 높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해방 이후 정부를 다시 세우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해방이 된 이후에도 중학교와 고등여학교를 간다는 건 어려웠고 미군정시기 부터 50년 전후 기초자치단체(주로 군지역)에 공립중고가 만들어지는데 지역 이름을 딴 중고교가 이때 많이 개교를 한다.
일제 강점기 지금으로 보면 공립학교 였지만 일본인 위주의 학교라고 보면 되고 고등보통학교와 구제중학교는 학년과 학과편성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었다.
학교의 차별이 있었고 여러가지 문제로 폭발한 사건중 하나가 '광주학생의거'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조선인은 고보(광주제1고등보통학교: 현재 광주일고 )를 일본인은 '광주중학교'를 다녔다.
모르는 이들이 생각하면 고보니 고등학생이고 중학교는 중학생으로 착각할 수 있는데 같은 연령대라고 보면 될 것이다.
수업연한을 중학교가 5년 고보가 4년, 여자고등보통학교(여고보)가 3년이었는데 1938년 조선교육령에서 내선일체를 부르짓으며 고보도 중학교가 되고 여고보도 고등여학교가 되는데 1942년 전시체제가 되면서 병력동원과 노동력 동원으로 인해 4년으로 단축이 된다.
아무튼 고보라는 이름을 쓰던 학교 경성제1고보 경성제2고보는 해방이후에도 역사를 이어가 경기고등학교가 되고 경복고등학교가 되지만 일본인이 주로 다녔던 학교들은 역사를 다시 시작한다.
경성중학교는 '서울중고'로 용산중학교는 이름 그대로 '용산중고'로 그러나 일제식민지의 역사는 단절을 하고 다시 새 역사를 시작을 했다.
또한 단절이 될 수 있던 근본 이유 중 하나는 선배들 중 우리나라 사람을 보기 어려웠던 일본인 위주의 학교라 새출발하는 동문들의 결정은 단호했다.
경성 제2공립고등여학교는 '수도여고'가 되고 경성 제3공립고등여학교는 '창덕여고'가 된다.
경성 제1공립고등여학교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조선인 학교였던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가 쓰게 되고 그 학교는 '경기여고'로 이름이 바뀐다.
다음으로 해방 이후 역사를 계속이어간 학교와 새출발한 학교의 학생들은 6.25전쟁시 많은 수의 학도병 그리고 현역병이 되어 군병력의 기간이 되고 이들은 복교를 하기도 하지만 군에 남아 장교가 되어 청춘을 보낸다.
또한 남고에 서울고가 다시 생겼듯 여고에도 서울여고가 만들어지기 위해 제2공립과 제3공립이 서울여고를 신청했지만 이름이 종복되어 수도여고와 창덕여고란 이름으로 다시 출발을 하고 마포에 58년도 만들어진 마포여고가 '서울여고'로 개명을 한다.
많지 않던 중등교육기관을 구분하고 차별하였던 일제는 조선을 영원히 지배하고 자신들의 삶의 터전으로 만들고자 했다.
문제는 이러한 차별과 대우를 받은 이후에도 피해의식이니 배타적이니 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편파적이니 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중립을 지키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지난 식민정책을 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며 이러한 차별은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다.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국 지역 언론사의 3.1운동 보도 (Sacramento Bee) (0) | 2024.02.24 |
---|---|
한강다리 폭파를 둘러싼 논란 (0) | 2024.02.24 |
아이들의 역사의식 (0) | 2023.12.12 |
영화를 통해서 본 12.12 반란 (1) | 2023.12.07 |
'서울의 봄'과 육사선배 '안병하 경무관' (0) | 2023.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