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구 김시현 선생과 황 옥 경부 그리고 의열단을 다룬 영화 '밀정'
영화의 줄거리는 상해에 있는 폭탄을 대량 반입하여 경성(서울)의 주요기관을 폭발시키기 위한 의열투쟁을 위해 의열단 리더 김우진(공 유)는 일본 경찰 안의 조선인 경부(현재 총경급) 이정출(송강호)을 상해에서 의열단 단장 정채산:김원봉을 모델(이병헌)과 함께 설득하여 철도를 이용 경성으로 향한다.
이 과정에서 총독부에서 따로 파견한 하시모토 경부가 이들의 정체를 알아 차리자 제거하고 안전하게 폭탄을 경성역까지 운반하나 함께한 의열단원들은 죽거나 체포되고 김우진의 폭탄은 이정출에게 인계되어 원하던 투쟁은 성공한다.
영화에서는 투쟁이 성공하지만 실제 사건에서는 발각되어 전부 실형을 산다.
실제 이 영화의 초기 일본경찰과의 김장옥의 총격전의 경우는 김상옥열사의 의열투쟁을 두번째 폭탄밀반입사건은 '황 옥 경부'사건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총독부로 자전거를 몰고 가는 학생의 모습은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졌던 김익상 선생과 관련이 있다. 또한 골동품을 통한 접근은 부산경찰서에 들어가 서장에게 폭탄을 던진 박재혁선생과 관련이 있다.
황 옥 경부 사건이란 김시현 선생이 대규모 폭탄 제조 사업을 착수하여 독일인 박사의 지도를 받아 시한폭탄(동양최초란 설이 있음)을 만들었고 이것을 수사한다는 이유로 경기도경의 황 옥 경부와 개성 경찰서장 하시모토 까지 대동하여 중국 텐진에서 폭탄(대형 6개 소형30개, 권총 13정 유인물 1만장)을 수하물로 위장 국경 안동현(지금의 단동)까지 옮기고 신의주에서 부터는 일본경찰의 도움으로 서울까지 옮겼으나 밀정 김두형의 밀고로 발각 전부 구속됨으로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아직도 황 옥 경부가 밀정인지 아닌지는 밝혀진 바 없다.
구속 되기전 1920년대 당시 폭탄 투척 사건에는 김시현 선생이 있었고 부인 '권애라 여사 '또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생활은 거의 없었고 4.19이후 잠깐이었다.
18년 7개월 옥고를 치루웠고 해방 이후 195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52년 6.25 2주년 기념식 및 북진촉구시민대회 에서 이승만 대통령 저격미수사건의 배후로 체포 70 노인이던 김시현 선생은 4.19때 까지 옥살이를 한다.
하구 김시현 선생의 호는 원래 고향 학가산의 우측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학우'였으나 총독 가이토가 '독립운동을 끊질기게 하는 선생에게 ('무엇을 구하러':하구)란 뜻의 하구로 바꾸었다고 한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선생과 가족이지만 대통령 저격사건 때문에 단 하나의 훈장도 받지 못했고 66년 조용히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의 유언은 이러했다.
"권 동지,(부인에게 ) 미안하오. 내가 그래도 조국독립을 위해 몸바쳐 투쟁했는데도 반쪽 독립밖에 이룩하지 못했소. 남은 여생을 조국통일 사업에 이바지해 주오."
영화 보다 더 치열했던 선생의 삶은 이렇게 쓸쓸했다.
다음으로 의열단의 의열투쟁은 단기간의 의협심으로만 준비된 독립운동이 아닌 이회영선생 일가가 사재를 털어 만든 신흥무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분들로 이루워진 조직체이며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비정규전과 정규전까지 아우르는 군사지식을 습득한 군인들이었다.
그들은 일제의 악날한 인사들과 앞잡이들 그리고 관공서를 공격한 분들로 그 공적은 후대에 알리고 교육해야 함에도 독재정권의 뜻에 어긋나고 친일청산에 소극적인 자들과 다른 길을 갔다고 하여 잊혀지고 공적을 취소한 행위는 비판받아야 하고 사실을 밝혀야 한다.
참고: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 한겨레 신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