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이야기

81mbc 대학가요제

lkjfdc 2022. 11. 14. 19:10

80년대는  경제가 성장하며 민주화가 이루워 지고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이 성공적으로 개최된 시기로 기억을 한다.

일반인들이 과거를 기억할 때 좋은 것이 많았고 특히 당시 젊었다면 더 좋은 기억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늘이 존재하며 70년대가 끝날 즈음 18년동안 집권을 했던 대통령은 측근에게 목숨을 잃었고 군대내에서 커온 하나회 출신 군인들과 그들을 따르던 자들은 계엄령하에서  권력을 잡고  재야 인사들과 대학생들은 그들과 맞서 보려고  하지만 무산된다.

조용해진  부산 마산과는 달리 광주에서는 유혈사태가 발생하고 많은 이들이 희생되지만 언론통제 그리고 분위기 전환을 위한 국풍81 같은 행사 그리고 올림픽 유치가 확정되면서 들뜨기 시작하는데 70년대 후반 대학생들의 시위를 막고  뭔가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기존의 가요제(강변가요제의 경우 강변축제였다가 강변가요제가 되고 시간이 가면서 TV에서 방송를 한다.)를 더 활성화 한다.

TBC가 하던 해변가요제,   젊은이의 가요제는  이름이 바뀌고 중간에  대학가요경연대회가 1회 열렸고 신인가요제가 있었다.  TBC방송국은 국영방송인 KBS가 되고 채널7은 KBS2가 된다.

그리고 KBS가 되면서 충남 서해안의 연포해수욕장에서 가요제를 개최한다.

70년대  광주의 전일방송에서도 78년~80년 전일가요제가 개최되기도 한다.






82년에는 젊은이의 가요제도 사라지면서 그 역량을 강변가요제로 쏟았고 KBS는 87년 대학가요축제를 만드는데 mbc에서 하던 대학가요제나 강변가요제에 비해선 지명도가 떨어졌던 것 같다.

그리고 mbc에선 87년에 신인가요제를 시작하는데 90년도가 넘어서도 지속된다.

한양가요제, 박달가요제 각 대학에서 외부의 대학생도 참여할 수 있게한 명지대의 '백마가요제' 광운대의 '월계가요제'도 있었다.


75년 대마초 사건은 가요계 내부에 지각변동을 가져왔고 특히 밤무대  공연을 위주로 활동하던 가수와  밴드들에게 큰 영향을 준다.

당시엔 통행금지도 있었고 북한과의 관계도 경색되어 분위기 또한 좋지 않았다.

노래중엔 금지곡도 많았고 대학가의 분위기 또한 사회의 영향을 받는데 77년 mbc대학가요제가 열리면서 표면적으로는 조금 부드러워진다.


80년대가 넘어가면서  신군부의 체제가 공고 해지며 겉으로는  국풍81축제 개최,  올림픽 유치 등 분위기가 좋아지고   통행금지가 사라지며 교복자율화를 시작하게 된다.




mbc대학가요제 또한 표면적인 사회를  반영했던 것  같다.

80년도 꿈의 대화가 대상을 받고 연극이 끝나고 난 뒤가 은상,  마그마의 '해야' 가 은상을 받았으며 특히 마그마는 대학생 밴드였지만 프로연주자들을 보는 것 같았다.

81년도엔  80년도와는 다르게 크게 알려진 대표곡이 줄었는데 대상은 한양대학교의 정오차가 '바윗돌'을 불러 수상했다.

보통 대상곡은 가요제 1집 음반의 앞면 맨 위에 실리는데 특이하게 당시 가요제 2집 음반 그것도 앞면 맨위엔 상을 수상하지 못하고  본선에 진출한 '스물한살의 비망록'이 실려있고 금상곡인 '잊고 산것'이 앞면 세번째에 있으며 바윗돌을 뒷면의 두번째에 있고 동상곡인 '안개'도 뒷면에 있다.


아마 흥행을 생각했던 것 같고 제작자들은 여러 판단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데 이러한 예는 81년 국풍 81 젊은이의 가요제에서도 1집에 금상인 '이 용'의 바람이려오가 실려 더 알려지고 대상곡인 갤럭시의 '학'은 2집에 실리며 유명세를 덜 타는데 실제 갤럭시는 대상을 받을 위치는 아니었다고 한다.


81년도 대상을 받은 바윗돌은 복학생이던 1학년 학생 정오차 아마 군대를 제대한 예비역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보통 군대를 다녀온 대학생들은 나이도 있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도서관이나 고시원에서 공부를 하며  동아리(써클이라고 했다.)나 다른 과외활동을 하지 않았었다.

가요제에서 대상을 받고 기성가요계에서 활동을 하던 정오차는 노래 바윗돌의 사연을 이야기 하면서 노래는 금지곡이 되었고 가수활동은 그만두게 된다.


노래를 만든 배경에는 5.18 때 죽은 친구의 사연이 있었으니 노래는 방송에서 더 이상 흘러나올 수 없었다.

그 이후 광주 출신의 가수 김원중이 '바위섬'을 부르면서 광주의 모습이  다시 언급이 되지만 광주의 모습을 감추고 싶어했던 이들에겐 그냥 지나 갔으면 하는 분위기였다.

세상은 평화롭게 흘러가고 아무일 없던 것 처럼 지나가고 있었지만 한 젊은이는  그냥 지나갈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