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이야기

용인과 조선통신사

lkjfdc 2017. 7. 17. 10:32

 

 

 

 

 

 

 

 

용인은 예나 지금이나 교통이 좋았던 곳이다.

 

용인의 교통중심지는 김량장 또는 금령역이라고 했고 위로는 광주로 서로는 수원 동으로 이천 아래로 가면 안성과 진천이며 임진왜란 병자호란 6.25동란 시기 전쟁을 피해가지 못했다.

 

 

실제로 용인을 거치면 진천이나 충주는 금방이며 특히 충북을 횡으로 통과하는 건 짧은 시간에 가능하며 충주를 지나면 바로 문경에 다다른다.

 

알다시피 격전지였고 지금도 투표를 하면 이지역의 표심은 안보와 관련성 있는 후보를 밀어 준다.

 

뒤집어 이야기 하면 동란시기 큰전투도 많았고 비극도 많았던 곳이다.

 

개인적인 분석인데 격실 사이로 길이 발달한 이곳은 전쟁을 피할 수 없는 곳이고 격변기 결정적 사건을 치룰 수 밖에 없는 곳이기에 후방이긴 하지만 용인, 이천, 안성,진천, 음성 ,충주는 주요 군사시설이 있고 교통로 또한 잘 정비되어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 서울과 부산을 오르 내리는 주요 교통로로 조선통신사가 일본으로 가던 길이 있었던 것이며 이길은 과거 임진왜란시 일본군의 접근로와 유사하다.

 

 

어쩌면 마음 먹기에 따라 진격로가 평화를 불러들일 수 있는 화해의 길이 될 수 있다.

 

 

당시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과의 화해를 통해 자국을 안정시키고 조선에서 오는 사신을 받음으로서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받고자 했을 것이다.

 

당시 통신사의 영접은 대마도 부터 극진했으며 일본은 백성들을 단속하고 교육하여 사절단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 했던 것 같고 우리는 나름 대로 일본의 상황을 파악하고 그들의 장단점을 알고자 했던 것 같다.

 

도쿠가와 막부의 후계자가 나올 때 마다 통신사는 바다를 건넜고 이것이 커다란 예산집행으로 이루워져 조선이나 일본의 부담이 되었던 것 같다.

 

개화기 때는 우리가 신문물을 보러 수신사와 조사시찰단을 파견하고 그 영향은 급진개화파의 형성을 강하게 한다.

 

아무튼 지금이나 과거나 이들이 지난 길은 정치, 경제, 사회,문화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음이 분명하고 이러한 조사를 정부도 했었지만 일본인 유학생이 발품을 팔며 조사한 적이 있었다는데 놀라움과 함께 부끄러움이 있었다.

 

멀리 있는 역사의 현장이 아닌 조금 돌아 보면 바로 있다는 것이 더 떨리는 일이며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