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정점인 것 같다.
휴가를 떠났다는 이들도 있고 아직은 일 때문에 (크게 바쁘지 않아도 한 이틀 시간을 내는게 쉽지 않다.) 어디 가지를 못하고 있다.
어릴 때는 휴가라는 개념이 없었고 아버지를 따라 큰집에 제사를 모시러 이맘 때 갔었고 초등학교 시절엔 아버지가 군대에 계셔서 TMO기차를 타고 서울역에서 동대구까지 가서 내려 서부터미널까지 가서 점심으로 짜장면이나 냉면을 한 그릇 먹고 대구시내를 벗어나면 먼지가 펄펄 날리는 길을 따라 현풍 거쳐 창녕의 이방거쳐 낙동강 전선 형성시 격전지였던 적포교를 건너 절벽같이 아슬아슬한 도로를 곡예하듯 지나 면소재지에 내려 작은 산을 넘고 전마선을 타고 논길을 걷다 보면 연못과 함께 큰 사당도 있는 곳이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던 곳이라 사방이 어둡고 큰 집 마당에 들어가면 대가족이 사는 곳이라 기척이 느껴지고 사촌아지매(형수)는 바삐 밥을 차려 내왔었다.
"걸어 왔능교? "
"택시라도 타고 오면 좋을낀데..."
" 어데... 택시는 가는 차비 까지 다 줘야 하고 오다 고장이라도 나문... 뻐스 안 떨가고 온 것도 다행이라 ..."
당시 인근의 초계면엔 택시들이 있었지만 비포장인 시골에 들어 오는게 쉽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덥다는 대구보다 더 더운 곳이 나의 큰 집 이자 본적인 경남 합천이었다.
그래도 뒷 편엔 대숲이 울창했고 집안엔 우물이 있고 대청도 넓어서 덜 더웠다.
큰집은 5~6대가 종손으로 이어진 곳이라 손님이 많았고 제사 모시는 데 드는 비용은 부산에서 사업을 하시는 둘째 큰 아버지의 도움이 많았던 것 같고 제사 지내는 일이 많아 사촌 형수와 큰 형은 늘 바빴고 자신을 돌 보기 어려웠다.
여름철 잠깐 다녀가는 길이지만 아버지는 근처 배나무에 봉지를 씌워주는 일을 하기도 하셨고 왕골을 수확하여 말리는 일을 하는데 말리기전 껍질을 벗기는 일을 2인 1조가 되어 마루에서 하다보면 더위가 가는지 오는지 모를 만큼 바빴다.
그러다 인근 초계에 사는 셋째 큰집에 들려 하룻밤을 자고 시간이 있으면 부산 큰집을 가서 광안리 해수욕장엘 들리고 자갈치 시장에도 가고 당시 막 유명해진 용두산 공원의 전망대도 갔었는데 그 때 본 부산항의 모습은 오래동안 남아 있다.
장거리엔 기차를 타고자 시간을 맞추고자 새벽같이 버스를 타야 시골큰집에 갔었고 중학생이 된 이후엔 자주 갈 수 없었다.
그나마 부산은 군대를 가기 위해 신체검사를 받으러 갔다 오고 가끔 큰 집에 일이 있어 갔었는데 시골 큰집은 다들 돌아 가셔서 가끔 지나다 들릴 뿐...
지금은 한나절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고 도로망도 잘 되어 있어 밤에도 잠깐 둘러 볼 수 있지만 어른들이 돌아가시고 친지들도 안 계시니 가봐도 예전 같지 않다.
가끔 여행철 입석을 타고 가기도 하고 대구에서 먼지 나는 길을 따라 가던 큰 집...
충북으로 이사를 갔을 때도 기차를 타기 위해 조치원 가는 충북선 기차를 기다린다고 2~3시간을 더운 날 고생하다 충주터미널에 가면 대구가는 버스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 때 부터는 버스를 타고 이화령을 넘고 문경 지나 상주거쳐 대구로 가던 기억들 ...
대구만 가면 다 간 것 같지만 막상 큰 집에 가면 대구와의 거리가 너무 멀게 느껴졌었고 부산도 먼 곳 처럼 느껴졌었다.
실제로 이동하는데 시간이 길었고 도로에서의 느낌은 기차에서 느끼는 감정과 달랐었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기차(KTX 말고 통일호가 없으니 무궁화호 같은 )를 타고 동대구역에서 내려 지하철 말고 시내버스를 타고 서부터미널에서 내려 직행버스를 타고 가 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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