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벼농사 위주의 농업은 축산이나 낙농으로 변화를 하는데 특히 경기도는 양주나 남양주가 낙농농가가 많았았다.
교통이 별로 였던 당시 그나마 우유의 소비가 많았던 서울이 있어 차로 2시간 이내의 거리인 이 지역엔 목장이 많이 들어섰는데 교통이 더 좋아지고 땅값이 오르면서 아래지역인 안성 그리고 천안등으로 확산이 되고 대도시에서 먼 강원도나 충북 내륙, 경상도 그리고 전라도 산간지역에도 축산과 낙농업이 확산된다.
교통이 좋고 우유의 수요가 많은 것은 낙농을 고기와 부산물을 얻기 위해서 축산이 발달하는데 산에는 초지를 조성하고 그외에 농가에서도 시설을 만들어 소를 기르게 된다.
한우야 길들이는 방법이 농민들간 인식이 되어 볏짚을 끓여 주거나 인근 풀숲에 몰고 가 풀을 먹게 하여 기르면 되었으나 갑자기 외국에서 대량으로 들여온 수입소는 일반농가에서 한우처럼 기르는게 쉽지 않았던 것 같다.
80년대 초중반 당시 대통령의 동생인 전경환은 새마을 운동 협의회 회장을 맡게 되는데 농가에 소를 보급하는 것에도 개입을 했었다.
외국에서 많은 수를 들여 왔었고 그에 맞는 초지와 목장에서 길러야 했으나 그것이 잘 되지 않아 기르던 소들은 시장에 많은 숫자가 쏟아져 나와 가격이 떨어지고 산가격과 파는 가격 그리고 사료값과 다른 사육비용의 증가로 인해 대규모로 기르던 이들도 힘들어지고 농가에서 소를 기르던 이들도 힘들어 지면서 여러 문제를 만들게 된다.
어떤 목장은 소대신 부담이 적은 염소를 길러 돌파구를 찾지만 쉽지 않았고 사육두수를 조절하긴 하지만 피해가 많았다고 한다.
처음엔 기쁘게 분양받은 송아지들도 얼마 못가 다시 시장에 헐값으로 나온 경우도 있었고 기존의 사육과 달라 시행착오도 많았던 것 같다.
지금은 지난 이야기가 되었고 축산이나 낙농사업도 많이 변화하고 80년대와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당시엔 서구의 혼합농업 체계나 신대륙의 기업적 방목 우리나라 안에서도 지역마다 그리고 농가의 현실에 따라 방법이 다르고 기르는 소의 품종도 달라서 여러문제로 힘들었던 것 같다.
농가소득이 증가하고 살림이 나아진 것도 좋고 국민들 식생활도 개선되어 좋지만 그에 따른 오폐수문제나 악취등 해결해야 할 문제 그리고 사람들 그리고 지역 간의 갈등 또한 심해졌다.
지자체 뿐 아니라 국가에서도 나서서 해결하려고 하지만 쉽지 않은 문제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