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이야기

70년대의 서울의 대형학원과 도서실

lkjfdc 2021. 1. 10. 10:09










현재는 노량진이나 강남 서초 송파 그리고 양천구등에 대형입시학원이 있으나 과거엔 종로일대와 광화문 주변에 있었다.

지금도 운영하는 종로학원도 있고 한때 이름을 날린 곳도 여럿이 있다.

양영학원, 양지학원, EMI, 삼영, 상아탑, 제일, 대일 등 훗날 이 이름들은 다시 노량진일대에서 시작을 학고 다른 학원들이 이어서 사용하기도 한다.

근본적인 이유는 도심에 있어서 모이기가 좋았고 고등학교들도 주변에 지금보다 많았다.

그러나 80년대가 되면서 올림픽을 준비하며 학원들은 노량진으로 이동을 했고 폐업을 한 곳도 있었다.

도심은 정비가 되고 일부는 재개발이 이루워진 경우도 있었고 보신탕집이나 뱀탕집도 자리를 이동했다.

당시 종로와 광화문 신촌에는 대형학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 독서실이라고 말하는 도서실이 있었다.

서울이 집인 경우도 있지만 각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이 학원에서 수업을 하고 도서실에서 자습을 하면서 73년 당시 좁은 대학문(서울대 3000여명 고대가 1900여명,서강대530명, 이대 1800여명,숙대 900여명,중앙대1400여명,수도여사대(현 세종대)540명, 경북대 1300여명,부산대 1400여명, 전남대 1200여명, 전북대 990명, 충남대790명등 모집정원이 3만명이며 보통 9만명이 응시하였다고 한다.)을 뚫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4당5락이란 말이 있었고 지금도 그렇지만 치열했다.

비평준화 시절의 명문고라고 말하던 각지역의 고교 교사들을 학교의 급여보다 많이 주고 영입하여 수업을 했고 퇴직 교장과 교감선생님들은 학원의 관리자가 되어 학생과 강사를 관리했고 수시로 학교운동장을 빌려 체육대회를 했다고 한다.

같이 고등학교를 다녀도 서로 몰랐던 학생들은 재수를 하면서 얼굴을 알았다고 하며 당시엔 재학생들도 학교를 마치면 종로나 광화문의 학원에서 또는 과외를 하니 학교를 다녀도 모를 수 밖에 없었다.

사회적 비용 또한 컷음이 당연하니 서민들의 불만 또한 대단했을 것이다.

80년대 과외금지조치가 이뤄지고 입시학원에서는 재수생만 받아서 수업을 하다보니 군소학원과 과외로 돈을 벌던 과외방은 문을 닫고 많은 이들이 학원계를 떠났다.

지금도 당시 전두환정권의 이 조치를 잘했다고 하는 이들이 많은데 음성화된 과외수업은 고액화되고 부유층과 특권층의 전유물이 된다.

논팔고 소팔고 어떻게 해서든 '사'자가 들어가는 직업을 얻거나 도시의 보통사람으로 살기 위해 당시 산업화가 가속화되던 시절 너도 나도 서울과 대도시로 향했다.

TV에선 강남일번지 같은 드라마가 나오고 달동네도 나오지만 시골에 사는 이들은 자식들 만큼은 도시인이 되길 바랬다.

그러나 실제 살아본 도시의 삶은 그리 만만치 않았고 그렇다고 다시 내려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당시 종로와 광화문의 학원과 도서실은 지난날 고도성장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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