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날 아랫층 아주머니께서 팥죽을 가져다 주셨다.
이사 올 때 부터 아이들도 귀여워 해주시고 늦게 퇴근할 때는 아이들을 돌봐주시기도 하고 간혹 손자손녀가 커서 못입는 옷이나 신발도 올려주셔서 은혜를 입었다.
어릴적 태어난 경기도 능내의 월세집 주인 할머니도 나와 가족들에게 많은 것을 주셨는데 당시 40대 셨던 그분은 비녀를 하시고 한복을 입으셨었다.
지금 생각하면 젊은 연세인데 당시엔 손자도 있으셨고 자식들도 6남매인가 있었고 장남 결혼식을 집안에서 구식으로 했었으며 그 당시 잔치가 열려 많은 음식도 먹었고 내가 생일이면 떡을 꼭 해서 주셨고 중학교 갈 때까지 멀리 충청도로 이사를 갔음에도 언 한강을 건너 버스 타고 오셔서 만든 음식을 전해주시고 간혹 서울가는 길에 능내에 들리면 주머니에 돈을 꼭 챙겨주셨었다.
밥은 주인집에서 먹고 간혹 잠도 자고 집의 아저씨들이 어업을 하셔서 한강에 고기를 잡으러 다면 따라 나서기도 했었다.
도시에 살면서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기도 했지만 수도나 전기요금 때문에 관계가 삭막해지기도 했고 주차문제로 인상을 붉히기도 하고 특히 누수문제는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아무튼 아랫층 아주머니는 추석에는 송편을 설날에는 떡만두국을 보름에는 나물을 가져다 주셨는데 우린 매번 얻어먹는 것 같아 죄송스러울 때가 많았다.
도시에 살지만 10여년 한곳에 살다보니 이웃과 나름 알고 지내고 신세를 지다보니 다른 곳으로의 이사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팥죽을 만드는게 손이 많이 가고 만들기도 쉽지 않은데 한숫갈씩 먹으며 동지를 넘겼다.
삭막하다고 말하는 요즘...
꼭 그런 것이 아님을 느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