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부마항쟁기념일이 있었다.
부산과 마산은 70년대 말 유신체제에 대한 불만과 적극 대항했던 신민당 총재 김영삼 의원의 제명으로 폭발직전이었다.
마산은 지금 창원과 합쳐졌지만 당시 경남의 수부도시로 도청이 있었고 그 위의 진주도 조용한 듯하지만 학생들이 독재정권에 대항에 싸웠다.
박정희 정권은 18년 가까이 유지하며 헌법을 여러번 개정 독재정치를 이어왔고 70년대 후반 경제상황이 전반적으로 좋지 않았고 공단이 많던 동남권의 경우 그 심각성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부산과 마산에는 전국적인 사태확산을 막기위해 특전사 예하 2개 여단을 투입하였고 포항에 주둔한 해병 1개 연대를 출동을 시켰다.
특전사의 무자비한 진압에 비해 해병대 병력들은 시위에 대응하는 방식에 있어 폭력을 사용하기 보다는 얻어맞아가며 자극을 하지 않았다.
당시 시위진압을 하는 것이 주로 경찰의 임무였고 특전사나 해병대의 기존임무는 특수전이나 상륙전이었다.
더 중요한 건 해병대 지휘관과 병력들은 당시 상부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기 보다는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 사태에 대응했던 것 같다.
정권은 발포까지 생각하고 있었으나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이던 측근 김재규(육사동기였으며 서로 호형호제하던 사이)에게 살해되었고 그 틈을 노려 군대내 사조직을 이용 병력을 동원 12월 12일 신군부는 쿠테타로 권력을 잡고 해를 넘긴 1980년 광주에서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한다.
부마민주항쟁과 광주민주항쟁은 서로 분리된 것 같지만 연결된 사건으로 우리나라 민주화 과정의 큰 사건이었다.
아직도 민주화 과정은 진행형이며 추구하는 목적도 시대에 맞게 변화하고 있다고 본다.
민심은 천심이며 그것의 반영이 잘 이루워지는 세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병록 제독의 정의당 입당 (0) | 2019.11.09 |
---|---|
한국영화 100년 기념우표 (0) | 2019.10.28 |
성균관엘 다녀오다. (0) | 2019.10.15 |
달성군 구지면에 있는 곽재우 장군 묘지 (0) | 2019.10.11 |
제 100회 전국체육대회 기념우표 (0) | 2019.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