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의 일생은 한쪽으로만 흐르지 않고 다양했다.
또한 안중근의사 뿐이 아니고 역사에 대하여 국방부나 각군은 연구소를 두고 연구해왔다.
그리고 7~80년대에도 군은 정신전력 차원에서 호국역사에 대한 부분을 깊이 연구였다. 그리고 2000년대엔 더 다양해졌다.
문제는 구군부나 신군부에 대한 문제를 연구한 노력은 아직 미흡한 것 같다.
오늘 기무사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이름으로 출범한다.
군은 장교양성과정 부터 현역군인들에게 올바른 정신을 함양하고 다양한 시각에서 역사를 볼 수 있는 교육에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면 한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에 대해 조금 이야기를 하겠다.
이분을 일본이나 우리나라의 특정 집단에서는 무도한 테러리스트로 깍아내리는 경향이 있는데 심히 잘못된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도마 안중근의 어릴적 이름은 안응칠이다.
몸에 점이 일곱개 이었다 한다.
김구선생의 어릴적 이름은 김창수이다 왠지 창수라는 이름이 정겹지 않은가?
또한 이승만 박사의 어릴적 이름은 이승룡이다.
안중근과 김 구 두사람은 같은 지역사람이지만 출신이 달랐고 가던 길이 달랐다.
그러나 나라를 찾는 일은 뜻이 같았다. 그리고 김구는 안중근의 조카 안미생을 며느리로 받아들였다.
아무튼 안중근은 1907년 정미의병 당시 해산군인들의 항거를 목격하고 지금의 러시아 땅 연해주로 망명하였고 1908년 국내진공작전에 적극 참여한다.
당시 2~300명을 이끌고 녹둔도 (두만강의 섬으로 이순신장군이 지켰던 곳) 에 집결했다가 국내로 진격 일본군 4명을 사살하고 10여명의 포로를 잡았으나 '만국공법'원리에 따라 풀어주었으나 위치가 노출당해 일본군에게 패퇴했다.
이 경험 이후에 안중근은 동의단지회를 결성하고 '이또오히로부미와 이완용등을 척살하기 위한 결심을 한다.
스스로 '대한의용군 참모중장'이며 '특파독립대장'을 자임했고 '이또오'의 저격을 국내 진공작전을 한 러시아 연해주의 의병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워 졌으며 스스로 죽을때 까지 군인으로 안정받기를 원했던 분이다.
참고문헌
심헌용 2007 한러군사관계사 국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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