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민족반역자 이근택의 집

lkjfdc 2017. 12. 22. 06:27

 

 

용인민속촌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속테마공원으로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다.

 

특히 이곳은 남향으로 되어 있는 전형적인 곳으로 옛관아 건물과 함께 각 지역의 전통가옥이 있어 과거를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특히 수원 남창동에서 그대로 이전하여 복원한 99칸 집은 민속촌의 대표적인 건물로 조선의 거물급 양반가의 형편을 볼 수 있고 그 규모에 입이 떡 벌어진다.

 

뭐 신대륙이나 중세 봉건시대 대 저택에 비할 수 없겠지만 농업이 기반인 사회에서 왕이 아닌 이상 이렇게 넓고 대단한 집에 사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 기와집은 관청 건물이나 향교 또는 서원 절집정도 되거나 권력과 경제력을 두루 갖춘 양반이 살 수 있었고 돈이 많은 부자 라고 하더라도 큰 저택을 소유하고 거주하는데엔 제약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사극에선 양반이나 부자하면 무조건 큰 기와집에 사는 것으로 나오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민속촌의 99칸 집은 대단하며 그곳을 갔을 때 느끼는 감정은 놀람과 함께 누가 이런 곳에 살았을까? 의문을 갖게 된다.

 

제작년 여름 나는 그 답을 당시 그곳에서 옛모습으로 근무를 하고 계시는 관리자 분에게 들을 수 있었는데 그 집의 주인은 을사오적 중에 하나인 '이근택'으로 이 집을 별장으로 썼다고 한다.

 

이근택 그는 군부대신이었다. 그의 고향은 충주다.

 

그가 권력을 잡기 시작한 건 을미사변 당시 충주로 피난간(충주 노은면) 명성황후를 만나면서 부터 였다. 여주가 고향인 명성황후는 인근 충주로 도망을 갔고 이근택은 이곳에서 명성황후에게 잘보여 훗날 지방관에서 시작 (물론 과거에 합격) 중앙무대에 진출하며 원래는 친러파였으나 일본이 러시아를 이기자 친일파가 되고 일본측에 조선의 내부정보를 알려준 역적이 되었으며 고양이에게 생선을 맞긴 꼴이 된 것이다.

 

을사조약 이후 일본으로 부터 다양한 혜택을 받고 권력을 갖게 되며 그의 형제들은 작위를 받게 된다.

 

그의 집에 살던 여자 종은 주인의 이런 행태에 분노하여 식칼을 내던 지며 호통을 치고 집을 나가 버렸고 화난 사람들은 이근택에 상해를 가했으나 살아남았다.

 

 

이들은 반성이 없었고 떵떵거렸으며 그 상징 중의 하나가 지금 민속촌의 거대한 저택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나라는 망했지만 가문은 영원하고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 민족을 배신했다.

 

 

어디 이사람 뿐이겠는가?

 

지금도 세상은 기회주의자가 득세하고 그들은 반성하지 않는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우리 민족의 부끄러운 과거를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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