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이야기

미군정이 만든 교육적인 토대

lkjfdc 2024. 3. 2. 20:13

해방이 되던 해 우리나라엔 점령군으로 미군이 9월 초에 소련군의 북한 점령(8월)보다 약간  늦은 시기 들어 왔고 당시 미군 사령관은 하지 중장이었으며  군정장관은  아놀드였다.

또한 이들은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의 영향력에 있었고 일본의 주둔군 보다 규모가 적었으며 미국 본토의  지휘보다는 일본의 사령부를 통해 지휘를 받고  보급에 있어 아래의 조직이라 보면 좋았다.

이들은 우리의 해방을 축하한 이들이 아닌 군정을 하는 군인들로서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일본인들의 재산이나 군사시설을 관리 한 후  빨리 본국으로 떠나 전역을 하고  전쟁전의 일반인으로  돌아가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들은 직업군인들도 있었으나 2차 세계대전으로 학교를 다니다 갑자기 군인이 된 이들도 있었기에 전문관료나 행정관리 보다 경험이 적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나라의 교육행정과 기반을 다지는데 있어 부족하겠지만  우리나라 인사의 참여(당시엔 친일인사 부터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등 다양)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은 '오천석'이었고 오천석의 추천으로 교육지도자들이 모이고 여기에서 7명이 선출 한국교육위원회가 만들어진다.

여기엔 현상윤이나 김성수, 백낙준, 유억겸, 김활란등이 있었고 유억겸이 군정시절 초대 문교부장이 되며 차장은 오천석이 된다.

그리고 1945년 11월 조선교육심의회가 구성되며 여기엔 100여명의 인사들이 모이는데 각 분과별로 정치인과 학자들이 들어간다.

김준연, 이극로,장면, 장덕수, 유진오, 백남운, 최현배, 장지연, 피천득, 조윤제등 다양한 인물들이 있었고 이들 뒤엔 미군들이 분야별로 있었으며 주로 계급은 중위 부터 소령이었다.

어쩌면 이 장교들이 높은 수준의 전문가가 아니었기에 우리나라의 인사들의 의견이 반영되었고 우리민족의  교육이념과 서구에서 유행하던 것을 혼합한  교육제도가 정부수립전에 만들어 진다.

그리고 열악했던 중등교육기관들이 1947년 초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학생수가 1945년 7만여명에서 15만 9천여명으로 증가한다.



일제는 자국 학생이 다니는 중학교(중고교 합친 형태)는 만들었지만 우리 나라 청소년들은 고보(고등보통학교)를 다녔고 지금의 시군구에는 농림학교가 있었고 지금의 중고교는 도시가 아니면 찾기 어려웠다.

해방 이후 그 수가 늘었고 여기엔 공립도 있었지만 사립도 증가한다.

이 당시 교육의 방향은 민주국가 수립이며 교육사상에서 존 듀이의 이론이 영향을 주기도 했다.

'홍익인간의 이념(민족 정체성)과 애국정신이 투철한 민주국가의 공민을 양성'하는 것으로 '일제의 충량'한 신민을 양성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식민지 정책에 협조했던 인사들도 있고 그 영향력에 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들에겐 민주시민을 기르고 교육이  획일주의나 과거의 유산을 전달하는 기능을 하기 보다는 사람을 생각하고 인간발달을 생각하는 교육을 목적으로 했으며 다양한 교과서도 편찬이 된다.

초등교육에서 시작된 움직임은 중등교육, 고등교육으로 확대 1948년 정부가 수립되기전 국정교과서도 만들었고 여기엔 미군정과 당시 교육을 책임진 인사들의 노력이 있었다.




이승만 정권이 만들어지기 전 교육기반은 완성이 되었고 본질적으로 교육분야는 정부의 지원과 지도도 중요하지만 교육자치제를 추구하는 모습도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의 기반을 다지는 데 있어 사립학교가 많아 지고 정부는 재정적 지원 같은 것을 담보 해주지 못한 부분이 있어 사학의 자율성을 높이는 부문도 있었지만 오늘날 까지 이어온 사학비리를 근절 못하는 문제가 상존하고 있다.





민주시민을 양성하고 교육의 기반을 만든 건 새로운 정부수립 전 부터이고 속칭 '건국절'이라는 이름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영향력과 업적을 과대 포장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본다.



우리나라에 대해 무지했던 미군들의 정책과 거기에 협조를 한 당시 국내의 지식인과 학자 정치인들이 부족할지 모르지만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기반을 닦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료참고: 손인수. , 한국교육사 2. 문음사,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