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한강다리 폭파에 대한 여러 생각을 하다 과거의 지도와 사진이 너무 부족하고 당시 기록이 빈약함을 느껴 50년대 한강다리 주변의 사진을 찾아 당시 폭파한 곳이 오늘날 노들섬 바로 아래 그리고 지금의 한강대교 아치가 없는 곳이 과거엔 한강소교라고 해서 폭이 좁은 교량으로 오늘날 노들섬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았다.
특히 위의 다리는 지금처럼 넓고 튼튼한 다리가 아니었고 그 아래는 모래와 습지라 사람들은 다리를 건너지 않아도 통행이 가능하며 당시에도 노들섬은 공원 비슷한 공간이 있었던 것 같다.
이곳에 피난갈 사람들이 있었을 수 있고 사람들을 위의 작은 다리에서 통행을 막을 수 있었겠지만 어두운 밤이라 강변과 모래톱을 통해 접근하는 민간인을 병력과 경찰은 통제가 어려웠을 것이다.
때문에 습지가 된 넓은 들에 피난민들이 있었을 것이고 땟목이나 작은배를 이용 도강을 하려는 이들도 있었다고 본다.
낮이 아니고 밤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을 강안이나 습지에 있던 사람을 통제하기 어려웠고 때문에 사망인원을 파악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폭파시간이 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여러 의문이 해결될 것이다.)
60년대 초반 한강대교 주변 위의 노들섬 위 폭이 좁은 다리가 있고 그곳에서 인원을 통제했을 것으로 판단. 그러나 새벽이라 사람들은 넓은 습지와 들로 쏟아져 나왔을 것이고 현재 노들섬 끝에도 통제를 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강을 건너기 위해 모였을 것이다. 폭파지점 대교와 대교 윗부분도 폭파시켰을 것
노들섬 주변이 60년대 초와 다른 것 같고 좁은 길도 강에 있고 자세히 보면 사람들이 있다. 북한군의 도강을 막기 위해 한강철교를 폭격하고 있다. 완전히 끊기가 어려웠고 결국 철교를 통해 전차와 병력이 넘어온다.
다음으로 한강교 폭파사진이라며 올라온 사진을 제목화면 전면에 올린 이 장면은 완전한 오류라 본다. 이 유튜버 주장은 군경만 소수 폭파시간 사망했을 거라 확신을 하고 많은 시청자들 여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아래 인터넷에 올린 사진을 이용한 것 같은데 다리를 폭파시킨 시간이 새벽2시(어두운 시간) 인데 이런 사진은 조명탄을 쏘고 찍어도 나올 수 없는 장면이다.
이 화면들 또한 아래 사진을 이용했는데 오류라고 본다.
강변의 기와집이 모여 있는 곳을 찾는 다면 어느 지점인지 알 수 있겠지만 새벽한강교 폭파사진은 아니다. 아니라면 낮에 항공기로 북한군의 이동을 저지하기 위해 폭격을 하는 것을 촬영한 것일 수 있다.
급박한 상황에서 지붕보다 높은 장소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데 한강교 폭파완 관련이 없다고 확신한다.
인터넷에 나온 사진자료를 참고함에 있어 원촬영자의 신상과 시간이 중요하다고 보며 틀린 자료인지 확인해야 한다.
결론을 내리겠다.
한강대교와 한강소교에서 완벽한 인원통제는 밤이라 불가능했고 커다란 폭발로 인해 500~800명이 죽었다는 증언은 사실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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