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끼리끼리 모이는지 조선 후기 영정조 때 형성된 중상학파의 학자들의 경우가 그렇다고 보고 그들을 키워준 정조도 그렇고 그들의 후손 또한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었다.
이들은 도시에 살았고 주로 양반의 적자가 아닌 서자로 실력은 있었으나 높은 자리에 갈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만나고 토론하고 세상을 걱정하며 고민하다 중국의 연행사로 가기도 하고 유득공 같은 이는 심양에 다녀오며 우리 역사의 관심을 북방으로 옮겨 '발해고'를 남긴다.
물론 박지원 이나 이서구 같은 양반의 적자들이 참여하여 서로 교류하니 요즘의 시각으로 봐도 배포있고 혁신적인 사람들이라 서자출신인 이덕무 , 박제가 , 유득공, 백동수등은 외롭지 않았다.(이들을 원각사탑에서 모였다고 해서 백탑파라 했다.)
이덕무는 책을 파고 지인과 교류 저술을 하고 비교적 늦은 나이 정조가 만든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되고 훗날 '청장관 전서 '같은 책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처남 '백동수'는 무예가 출중하였으며 당연히 무과에 합격은 했지만 서자다 보니 미래가 밝지는 못했고 당시 가족들을 데리고 강원도 인제로 들어가 농업을 하다 훗날 정부에 복귀 그 유명한 '무예보통지'를 만드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다.
이 무예보통지는 구전이나 어려운 글로 써 있는 무예체계를 그림으로 그려 설명하며 언문으로 써있는 것도 있어 당시 허약해져가는 조선군의 군사적 능력을 강화시킬 수 있던 자료였다.
이들은 일단 오랑캐라고 부르던 청의 정치, 경제,사회,문화를 꿰뚫어 보고 그들을 통해 들어 오는 서양문물을 받아 못살고 양극화된 조선사회를 변화시키려고 했고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알아 내고자 각종 자료를 분석하고 발품을 팔아 중화사상에 매몰되었던 주류지식인 사회를 벗어나고자 하였다.
이들 중 박제가는 배나 수레를 사용하여 운송의 효율을 기하고 기왓장과 벽돌을 체계화하고 도로를 만들며 소비를 하여 공급을 유도하는 방안을 찾았고 양반도 장사를 하며 생산적 직업에 나설 것을 설파했다.
정조는 이들과 조선의 마지막 기회를 살리고자 했으나 가버렸고 이들 또한 공직생활을 했지만 뒷날 몰아 닦친 사화나 정치 변화에 견디지 못하고 기회를 잃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법 양반의 자손이었지만 서자여서 높은 자리도 그렇다고 생업에 나서지 못한 가난한 선비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생활고에도 굴하지 않고 경제와 역사 문화를 통해 조선을 살리려고 했으나 그 시기는 너무 짧았다.
훗날 이들의 후손중에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가 나와 개화정책에 영향을 주었고 이덕무의 아들 이광규도 큰일을 하며 그리고 손자 오주 이규경은 백과사전을 만들어 조선 후기의 지식을 집대성한다.
아무튼 지식인들의 친목과 교류가 당대 사회를 활기차게 만들어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고 자신들의 이익보다 조선의 힘든 백성을 위해 노력한 점은 오늘날 우리의 지식인들이 어떤 길을 가야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표이며 기준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