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이야기

봉오동 전투 전승 100주년 기념우표

lkjfdc 2020. 6. 13. 10:34





지난주 금요일엔 봉오동 전투 전승 100주년 기념우표가 발행되었다.

봉오동 전투는 영화로 나오기도 했으며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홍범도 장군을 기리는 우표도 발행이 된적이 있다.

교과서에 무장독립투쟁의 대표적 전투로 잘 나오는 것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인데 두 사건은 연결된 과정으로 봉오동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이 만주땅의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대규모 정규군을 투입했다 계곡에 갇혀 공격을 받고 혼란이 생기고 크게 패배한 전투가 '청산리 대첩'이다.

어느 한 조직만 독립전쟁을 했던 것이 아니고 다양한 신분과 계층으로 조직된 조직이 있었으며 특정 종교를 믿는 신자들이 모이기도 했고 홍범도의 경우는 사냥군출신이었다.

다양한 신분 다양한 계층의 조직들은 추구했던 세계관이 달랐으나 연합하고 뭉쳤었다.

일본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에 대한 분풀이로 만주의 간도지역 교포들을 잔인하게 죽였으며 활동기반을 잃은 독립군은 당시 소련지역인 자유시로 이동하여 새로운 준비를 하지만 큰 변란을 겪고( 자유시 참변) 다시 만주로 돌아와 참의부나 정의부, 신민부등을 결성하고 훗날을 도모한다.

그후 조선혁명군이나 한국독립군등이 조직되어 중국군과 연합을 하여 일본군과 전쟁을 만주땅에서 벌이나 만주사변이 일어난 이후 조직의 변화와 노선을 둘러싼 분열로 위 아래로 흩어진다.

그리고 한국광복군이 충칭에서 조직이 되나 중국 국민당군의 지원을 받고 미군의 지원을 받으며 활동하던 소극적인 행보에 실망한 병력들이 북쪽으로 이동하여 팔로군이 되고 또 중국과 연합하여 싸우던 동북항일연군은 소련령으로 들어가 소련군이 된다.


결국 해방 이후 이남과 이북으로 분리된 ( 북으로 간 군인들이 대다수) 군인들은 각자 자신들의 노선에 따라 인민군이 되고 국군이 되었다.

6.25동란이 발생하여 북쪽의 대규모 병력은 남쪽으로 총부리를 겨누고 처들어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만들었고 7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봉오동 전투가 일어난 지 100년 길다면 긴 시간이 흘렀다.

다시 독립군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으나 아직 약하다.

과거를 통한 배움으로 다시는 외세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백성들이 희생되며 서로 분열되어 싸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