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엔 서울을 다녀오다 양화대교 바로 근처인 절두산 기념관과 성당 그리고 외국인 묘지를 다녀왔다.
사실 이곳은 전철이나 버스 또는 자가용을 타고 지나면서 한 번은 꼭 가보고 싶었던 지역이었다.
가파른 절벽 아래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뭔가 좁은 공간일 것 같은 터에 (실제론 넓음) 건물이 들어차 입구를 찾기도 애매하고 복잡한 구간이라 어떤 경로로 들어가는 줄 몰랐었다.
벌써 25년 가까이 되었을까?
예전 돈이 떨어졌는데 갈 곳도 마땅치 않고 추운날 2호선을 타고 시내를 뱅글뱅글 돌았었다.
그때 홍대입구를 빠져나왔을까? 바로 옆에 교과서에서 봐왔던 절두산순교지 터가 들어오는가 싶더니 바로 기차는 철교를 내 달렸다.
그리고 자세히 볼 수 없음을 탓하며 계속 한번 가봐야지 하면서 못갔다.
그러다 양화대교를 잘못 들어가다 입구를 찾았으나 차는 못들어가고 한강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조금은 가파른 기념관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넓고 오래된 흔적들이 많았고 과거 마포나 신촌일대가 개발되기 전 부터 있어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얼마 안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강과 어울려 주변을 조망할 수 있고 예전 한강에 배가 들어 올 땐 서해로 통하는 길목을 감제할 수 있는 곳이란 걸 딱봐도 알 것 같은데 이곳은 이름처럼 천주교 박해가 강했던 시기의 상징으로 정부에서는 신도들을 처형하며 목을 날린 참혹한 장소였고 그러한 사건 이후 외세의 군대는 강화도와 김포로 들어와 격전을 벌이는데 그 처음이 '병인양요'였다.
종교의 가치를 떠나 외세의 칼끝이 우리가 대국이라고 생각했던 청나라를 겨누고 일본은 자진해서 문을 열었고 특히 일본에서는 서구를 배우고자 유럽으로 사람들을 보내고 여러 경로로 정보를 모을 때 바로 우리나라 위쪽엔 대륙으로 동진한 러시아가 두만강 주변을 어슬렁 거렸다.
이런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정부는 종교인들을 통해 서구열강의 협조를 얻고자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일본 또한 종교로 카톨릭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 뒤의 서구열강의 뒷모습을 아는지라 제한된 무역을 실시하고 그들의 힘을 인정하며 그들의 것을 배웠지만 우린 그 시기를 놓쳤고 주변 상황에 대한 것을 몇몇의 학자들만 알았던 것 같다.
세계정세에 무지했고 외교문서까지도 한글을 배제한 한자로 만들다 보니 정확한 해석이 안되 논란이 생기고 모든 정보 통로와 외교관계가 청나라만을 통해 들어오고 그마져도 제한되다 보니 시기를 놓쳐 버렸다.
어쩌면 보편적 세계정세와 인간의 존엄에 관한 기본적 가치에 역행했던 천주교 박해로 인해 조선은 더 위험해 지고 당시 지구의 식민지 중 가장 교묘하고 무시무시한 자들 더군다나 이웃인 일본인들에게 핍박을 받고 고통을 받았는지 모른다.
그리고 백년이 훌쩍 넘었다.
지금도 어쩌면 다양한 채널이 아닌 해양세력의 주축인 미국과 일본등에 의존하여 관계를 맺고 그보다 더 다양한 세계에 대해 무지한 상태 혹은 알려고 하지 않고 좁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