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의 복무월수가 1968년 30개월에서 36개월로 증가한다.
그리고 77년 33개월이 되고 84년 30개월이 된다.
68년의 복무연장을 1.21사태로 인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고 표면적인데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월남파병으로 인한 전투병력(베트남에 주둔한 지상군 병력이 2개 사단 1개 여단 그리고 지원을 하는 해공군 포함: 약 3만여명 연인원으로 추산하면 훈련된 인원들이 파병을 다녀왔다.)의 유출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무장공비나 비정규전을 수행하는 부대가 가장 두려워 하는 이들이 정규군 보다는 비정규군 즉 예비군으로 여기엔 동원예비군 말고 향토예비군이 더 알 수 없는 이들이고 임진왜란 시기와 비교한다면 의병에 가까운 병력들이고 작전지역의 지형을 잘 아는 이들이다.
그리고 방위병들이 있는데 초기 방위병을 담당하던 부서는 내무부 경찰이었으나 70년대가 되면서 국방부의 육군이 주로 방위병을 관리하며 당시 군복은 예비군복에 계급장이 없었고 시간제로 근무를 하여 채웠다.
그러다 베트남 전이 끝나고 병력들이 귀국을 하면서 기계화 보병사단이 생기고 예비군제도와 방위병제도가 정착이 되면서 1977년 33개월 그리고 84년 30개월이 되며 80년대 초중반 방위병들도 현역들과 같은 군복을 입으며 계급장도 부착하고 군부대로 출근하는 병력들은 도시락을 싸가지 않고 급식이 지급되며 PX 이용도 가능했다.
특히 우리가 간과하는 부분이 입대하는 육군 현역병까지는 아니지만 10여만명 이상이 매년 방위병으로 소집이 되었으며 그리고 매년 현역병 방위병 장교 부사관등 적어도 20만명 이상이 예비군이 되어 동원예비군, 학생예비군, 그리고 일정기간이 지나면 향토예비군으로 전환 지역을 책임졌다.
특히 70년대에서 80년대 90년대 초까지 방위병들과 그 이후 상근예비역으로 복무한 이들이 지역에서 출퇴근을 하며 부대에 근무를 하고 중요한 지역에서 경계근무를 하고 병무행정을 담당하고 지역무기고를 지켜내며 경찰의 업무까지 보조했던 노고를 잊어선 안되겠다.
또한 이촌향도가 단행되어 청년층의 유출이 많았을 때 이농현상이나 이어현상이 높은 지역에서 20대 초중반 청년들이 지역을 지키게 했고 지역의 일꾼으로 버텨주었기에 촌락이 유지된 점이 있고 특히 한강이남의 향토사단과 동원사단의 경우 이들이 주요 전력으로 참여 했기에 대군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인원은 징집인원의 1/3이 넘고 현역병 입영대상자에 조금 못미치지만 엄청난 병력이었음에도 정규군 숫자에 계산이 되지 않았었다.
현재 50대 이상 70대 초반 성인 남성의 1/3은 방위병으로 복무를 했음에도 이에 대한 사실과 기록 그리고 방위병으로 복무한 이들의 군시절 내용들은 사실보다 폄하되거나 혹은 과장되어 당시 힘들게 복무한 사람들의 노고를 그냥 지나치게 한다.
병역을 기피한 것도 아니고 정부의 명령으로 복무한 보충역의 노고를 가볍게 봐서는 안된다.
특히 군복을 입어보지 않은 이들이나 일부 군을 모르는 사람들까지 방위병들의 역할을 폄하해서는 안되며 요즘 유행하는 강철부대에 나오는 특수부대요원 같은 군대에만 기준을 두다 보니 뭐가 힘들고 뭐가 군대를 지탱해주는지 모르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
미군이 베트남에서 실패한 이유는 무기가 약해서 군대의 숫자가 적어서 또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수많은 비정규전 병력과 지역주민들과의 긴 싸움 그리고 민심을 얻지 못해서 철수를 했다.
지금도 여러 형태로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형태로 복무하는 이들이 있지만 과거의 방위병제도에 비하면 적은 숫자라고 본다.
과거의 제도를 복기하여 우리의 현실에 맞는 국방정책이 시행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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