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 따라 느낌이 다르겠지만 지금도 서울 그리고 대도시 일부 땅값이 비싼 지역의 고층아파트나 고급빌라는 불가능 하겠지만 낮은 층의 아파트나 당시 서민들이 살 수 있는 작은 평수의 집은 지금도 살 수 있다.
80년대 중 후반 6평 정도의 방의 월세가 5만원 정도 (이 돈도 10개월치를 선불로 지불을 해야 했다.) 당시 읍단위 이상 중학교의 1기분 수업료가 4~5만원 내외 단 면단위는 절반이니 2만원 내외였다 . 고등학교 1기분 수업료가 7만원 내외 대학교 1학기 등록금은 국공립이 50만원 내외 사립이 60~70만원 정도 했다.
이 수업료가 오를 때 학생들은 총장실 점거하고 재단과 협상을 하는 경우도 있다.
당시 물가가 안정되어 슈퍼에 가면 양껏 사먹었다고 하지만 당시 물가 또한 많이 올랐는데(물가가 오른게 다 나쁜 건 아니다.)그것을 알려면 우표값(70년대 말 20원 80년대 초중후반 30~60~70~80~100원)을 참고하면 된다.
나이키나 프로스펙스 좋은 운동화의 경우 런닝화가 10000원 내외 테니스화가 20000원 내외로 월급에 비해 많이 비쌌다.
때문에 청소년들은 몇 천원 짜리를 사 신었다.
80년대 중반 레코드판이 3000원내외 정도 테입도 2000원 지금의 우표값이 430원 이니 당시의 물가도 만만치 않았다.
쌀을 살 때 일반미는 비싸다고 해서 정부미를 사먹었으며 연탄을 때고 사는 집이 90년대 초반까지 있었다.
그리고 당시 공장이나 사기업체를 보면 한달 중 휴일이 2번 (2번째 일요일, 4번째 일요일)이었는데 지금 이렇게 하는 곳은 많이 사라졌다.
집에 냉장고 없는 집도 많았고 학교의 급식은 일부 농촌학교나 기숙학교에서 이뤄졌고 이것도 실습을 가장한 노동과 함께 기숙사 비용을 내야 가능했었다.
도시의 학급구성원은 60여명이 넘었고 도시락을 두개 싸가는 고등학교 땐 주로 김치가 대부분이었고 자취를 하는 학생중엔 도시락을 싸오지 못했으며 두개의 도시락 중 여름이면 상하고 변질되는 경우가 있어 먹고 탈이 난 경우도 있었다.
아프면 약국에서 조제약을 사먹기도 했지만 그냥 기성약을 사먹었고 어른들은 병원 보다 '뇌신' '명랑' 같은 약을 복용했고 병원을 가거나 안경을 맞춰 쓰는 건 지금보다 어려웠다.
그리고 만원버스와 함께 지옥철이라는 말도 있었다.
전화기는 보급이 늘긴 했지만 설치비가 싸지 않았다.
또한 공안정국을 유지하기 위한 시위진압 경찰력은 강력했으나 일선 지파출소는 경찰력이 부족해 치안도 완벽하지 못했고 범죄도 많았었다.
시골에서 조용히 살 던 이들이나 먹고 살기 바빠서 무관심한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대학엔 사복경찰이 있었고 시위하다 군대로 갑자기 가는 경우도 있었고 군대에서도 감시를 받았다.
당시를 그렇게 느끼는 건 젊었었고 희망이 있었고 힘들고 괴로운 것 보다 좋은 걸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마치 힘들었던 군생활 중 잠깐 동안 기뻤던 기억을 더 떠올리고 싶어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좋은 건 기억하고 나쁜건 잊고자 하는 것과 자신만의 주관적인 느낌을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현상으로 특히 당시를 경험하지 못한 신세대들이나 청년들에게 현재의 모습이 당시 보다 암울하고 힘들며 너무나 안좋고 희망이 없다는 식의 유튜버 방송은 문제가 있다.
그리고 40~50세대는 꿀을 빨았고 혜택 또한 많이 봤다고 하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당시 취업이 잘 되었다. 대학만 나오면 일자리가 졸업과 동시에 있었다. 공부를 지금 보다 열심히 하지 않았고 대학생은 데모만 하고 놀았다는 식의 이야기는 맞지 않다.
지금이 과거에 비해서 다 좋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당시가 지금보다 사람 살기 좋았다는 식의 주장을 젊은이들에게 전달하여 성별간 지역간 문제로 시끄러운 시기에 더 많은 갈등을 유발시키는 것이 아닌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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