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독립운동가의 경제형편

lkjfdc 2021. 1. 20. 10:18


용인 민속촌의 99간집(이근택의 집),용인추계리의 송병준 별저 반대로 여주 대신면의 임시정부 군무부장 조성환 선생 생가( 이집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한다고 매각해서 지금은 다른이가 소유했다.) 여주의 엄항섭 생가터, 용인 원삼의 오광선 장군 생가터...


도시의 경우 도시계획으로 인해 독립운동가들의 생가는 사라질 수 있으나 시골의 경우는 보존될 수 있었겠지만 일반적으로 뿔뿔이 흩어졌거나 자식이 먼저 세상을 뜬 경우도 있었다.

이화여대 총장을 했던 김활란 친정쪽의 사학재단, 친일 기업인 박흥식의 재산 그리고 사학재단들 ... 이들 말고 많은 사학의 재산들이 친일인사들 것이다.


반대로 삼한갑족이었던 이회영선생의 집안은 그 많던 재산을 팔아 신흥학교를 만들었고 훗날 곡기를 이어가기 힘들었고 후손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회영선생일가의 재산형성은 멀리 권 율장군 때까지 올라간다.

권 율장군의 사위가 바로 오성대감 이항복이며 아들이 없던 장군의 한양 땅 재산은 계속 이어졌고 또한 대대로 고위공직자였던 이회영집안은 명동한폭판에 집이 있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헐값에 매각 하여 망설임도 없이 가족 뿐 아니라 집안의 일꾼들까지 만주로 간다.

친일행위를 했던 이들은 일본이 그렇게 쉽게 망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친일인사들이 욕을 더 많이 먹는 이유는 평범하게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던 이들이 아니고 신분도 높았고 그 신분이 고위공직자부터 교육계나 학계 그리고 종교인들로 사적인 인맥관리 또한 좋았고 마음 좋고 돈 잘쓰는 집안 어른이기도 했다.

때문에 함부로 욕하면 모임이나 집단에서 배제될 수 밖에 없으니 조용해야 했고 침묵했다.

나라의 녹을 먹는 공직자는 망할 때 같이 망하고 죽을 때 같이 죽는것이기에 이들에게는 평범한 백성보다 부담을 느끼는 자리를 주고 신분을 보장해 주고 명예를 줬던 것이다.

꼭 공직자가 아니더라도 큰 부자나 종교의 지도자들은 그 잣대가 일반인 보다 엄정하다.

문제는 나라가 망할 때 앞장선 유생들이나 공직자도 있으나 대부분은 일본정부로 부터 돈을 받고 호의호식을 했던 것이 사실이고 당시 더불어 함께 갔기에 부끄럽지 않았던 것이다.

반대로 나라로 부터 뭐하나 받은 것 없는 못배운 머슴이 또는 촌의 농부가 아니면 계급이 낮았던 병졸이 총칼을 들고 나섰으며 일부 공직자의 경우 대대로 누려온 자리를 버리고 일제의 교묘한 농간에 저항하고 의열투쟁을 한 경우도 있었다.

돈관계나 신용이 불확실하고 집안을 돌보지 못했으며 이국생활 하며 신분을 감추고 피해다니느라 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유명 유투버가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들을 비교하면서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냐? 안 살았냐? 를 놓고 망언을 하여 욕을 먹고 있다.


이걸 좌우논쟁이나 이념논쟁 또는 진영논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터무니 없고 내생각엔 사람들 관심을 받아 유튜브에서 수익을 창출하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소설 '태평천하'에 나오는 '윤두섭' 처럼 돈과 이름값에 몰입하고 그것을 노린다고 본다. 아니면 소설 '꺼삐탄 리'에 나오는 '이인국박사'처럼 처세술에 능한 사람을 보수의 기준으로 본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보수는 그렇게 얇팍하지 않고 카멜레온 같이 살지 않는다.

물론 '진보'라는 개념 또한 다시 정립 되어야 하며 진보가 무조건 좋고 신선하고 옳다고 보지 않는다.

어짜피 사람들은 다 잊어버릴 것이고 친일파가 뭐가 대수인가? 지금 같이 할말 다해도 돈이 들어오는 이 태평천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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