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무헌궤도의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 LP

lkjfdc 2018. 11. 26. 08:54

 

 

 

 

 

 

무한궤도의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88년도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았던 무한궤도는 건반을 더 보강하여 89년 음반을 발표한다.

 

 

이들 중 고 신해철과 1집에 새로 참여한 정석원이 조형곤이 프로를 지향했고 나머지 구성원들은 학교로 돌아가 음악보다는 다른 직업을 찾는다.

 

그리고 신해철은 솔로로 전향했다가 NEXT를 만들어 활동을 하고 정석원은 친형 정기원(장호일: 서울대 스쿨밴드 갤럭시 출신)그리고 조형곤과 015B를 만들면서 당시 객원가수로 윤종신 그 후 김돈규, 이장우,김태우(GOD출신 말고 훗날 뮤탄트라는 밴드 결성 ),성지훈 그리고 훗날 서브웨이라는 밴드를 만든 조성민등도 활동을 한다.

 

물론 조현찬등이 015B의 연주에도 참여를 하며 NEXT의 멤버였던 이동규도 참여를 한다.

 

80년대 초중반 기타를 앞세웠던 하드락이나 메틀보다는 다소 부드럽고 건반에 컴퓨터까지 접목한 시도는 마치 핑크플로이드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특히 신해철을 중심으로 고교 때 부터 밴드음악을 하던 무한궤도의 구성원들은 프로는 아니지만 어떻게 하면 관객에게 어필하고 만족할 만한 소리를 낼까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아마 대학생이 되어 실외에서 연주하는 강변가요제나 지역예선을 겨루고 나오는 과정에서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을 과거 밴드 출신들인 부활의 김태원이나 이승철이 탈락한 전례를 보고 연구하고 다듬어 탈락도 해보고 무한궤도는 대학가요제에서 판을 뒤집어 버렸던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사실 방송국 악단이 연주해주고 프로가 편곡한 솔로가수의 연주와 간단한 악기편성으로 편곡된 연주를 하는 밴드는 불리할 수 밖에 없었고 이것을 파악한 이들은 신디사이저에 컴퓨터를 도입 그 약점을 극복했던 것 같고 실외나 대공연장에서 그들의 실력을 발휘하여 밴드음악의 진수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물론 기성가수가 되면 방송국의 제한된 시스템에서 반주테입을 틀고 시늉만 하거나 가수만 노래를 하면 되니 밴드의 구성원들 전부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수익의 분배구조에 있어서도 불평등이 생기고 기형적으로 전면에 서는 보컬리스트 즉 가수만 부각이 되게 되고 이것이 가요계의 질적인 발전을 막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걸 극복하고자 객원연주자를 써서 그때 그때 밴드를 하기도 하고 반대로 015B의 경우는 연주자들이 객원가수를 두는 시스템으로 간 경우도 있고 서로 연주자들을 찬조하는 경우로 발전했다고 본다.

 

아무튼 90년대가 지나면서 대학가요제나 강변가요제에서 밴드의 입상은 가끔 있었고 이들은 과거 분위기만 담당했던 건반을 연주에 활용하여 효과를 본다.

 

물론 그 시작은 87년 입상했던 중앙대의 블루드레건(이규석이 기타를 치며 후배들과 나옴)부터 조짐이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리고 훗날 나온 연세대의 '소나기'도 그러하고 하드하고 센 음악보다는 조화를 강조하는 분위기 였다.

 

 

아무튼 신해철은 사운드를 더 강하게 하여 NEXT라는 밴드를 활성화 시켜 시대를 반영하고 화려하게 이끌었으나 너무 일찍 고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라는 노래는 무한궤도의 1집 앨범의 머릿곡으로 나는 이 노래를 89년도 겨울인가 군대있을 때 TV를 통해 처음 들었고 그 이후엔 이 노래를 화면에서 볼 수 없었다.

 

 

노랫말이 철학적이고 무거워 듣다가 한참 생각을 했었고 특히 코러스와 어우러지는 연주는 마음을 흔들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