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성냥에 관하여

lkjfdc 2018. 1. 22. 08:37

 

 

요즘은 케익에 불을 켤때 쓰거나 할 때 볼까 작은 성냥과 곽은 보기 어렵다.

 

과거 불씨를 중요하게 다루던 시기엔 불을 꺼트리게 될 경우 새롭게 불을 켜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급진개화파가 일본에 다녀온 후 성냥을 그어 불을 켜는 걸 보고 문명개화 하겠다는 의지를 확인했다는 글을 어릴적 본적이 있다.

 

그리고 과거엔 지방마다 성냥공장이 있었고 특히 남학생들은 짖궂은 노래 중에 '인천의 성냥공장 ~ 어쩌구 노래를 불러 여학생들을 경악케 하고 군을 제대한 예비역들은 성냥공장 뿐 아니라 딸기농장 부터 설탕공장 까지 더많은 노래를 불러 안그래도 단순 무식하다는 의견을 재확인 시켰었다.

 

실제 인천엔 개화기 우리나라의 첫번째를 다투는 것이 많았는데 염전 뿐 아니라 성냥공장이 가동이 되고 유명했었다고 한다.

 

문제는 인천에서 공장을 만들 때 지금도 쫄면이나 냉면을 만드는 곳이 있지만 당시 밀가루 같은 식료품 공장은 일본인 거주지역 근처에 일일이 손으로 포장을 하고 화재에 취약한 위험물질인 성냥공장의 위치는 열악한 조선인 거주지역 근처에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한 때는 광고용으로 또는 다방에서 담뱃불을 필 때 손님들이 하나둘 챙겨가지고 가고 간편하고 싼 가스라이터가 나오기전 다방 뿐 아니라 비싼 술집에서 성냥을 준비했는데 지금은 카드사용내역 때문에 덜미를 잡혔다면 당시엔 요상한 상호의 성냥갑으로 인해 부부싸움을 하거나 잔소리를 들었다.

 

군대에 가서는 야외에 훈련을 가서 담배를 피려고 하는데 귀한 라이터 대신 성냥을 가져 갔으나 물에 젖어 버려 못쓰게 된 경우도 있었고 하나 남은 성냥을 긋다가 불을 꺼뜨려 괜한 욕을 먹고 시달림을 당했었다.

 

라이터 보다는 곤로에 불을 붙일 때면 석유냄새를 맞으며 성냥을 긋던 생각이 나고 번개탄에 불을 붙이기 위해 애쓰던 그 때가 생각난다.

 

이젠 집들이 때도 성냥을 사가거나 양초를 사가는 경우는 없겠지만 한꺼번에 들어온 통성냥을 아껴쓰던 그 때가 생각난다.

 

여러 공장이 문을 닫았지만 불씨를 만드는 성냥공장이 사라졌다는 걸 과거의 개화파 인사들이 보았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