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 죽미령 UN초전비를 방문하다.
오산 죽미령은 화성 병점에서 오산으로 향하는 고개로 1번 국도가 통과하며 근처엔 임진왜란 때의 격전지인 독산성이 보이고 맑은날엔 서울의 관악산 군포 수리산 수원 광교산이 가깝게 보이고 수원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동란 초기 당시 전차와 맞붙은 곳은 이 곳 말고도 춘천과 의정부로 춘천의 경우 초기엔 전차와 비슷한 포병의 자주포에 대응해 대전차 포를 쌌으나 효력이 없어 화염병과 수류탄을 이용 육탄으로 저지했고 홍천에서도 유사한 방법을 썼다.
그리고 의정부 축석령에서는 당시 미군이 공여한 구형M3 105mm곡사포를 이용 직접조준하여 전차를 잡았으나 후속전차에 의해 국군 50포병대원들은 폭사한다.
전차는 무서운 무기였지만 도로가 빈약한 당시 상황에 큰 위협이 될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고 미군은 국군에게 전차를 주지 않았다.
근본적 이유중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북한으로 쳐 올라갈 경우 난처해질 미국의 상황도 감안한 측면이 있다.
전쟁이 발발하자 UN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는 (당시 70이 넘은 고령) 당시 일본 큐슈에 주둔했던 24사단 예하 21연대 1대대(부대장 스미드 중령)에 추가된 52포병대대의 A포대 (중대급 105mm곡사포 6문) 를 일본에서 부산을 거처 기차로 그 다음 트럭으로 오산죽미령에 배치했다.
당시 국군은 미국의 참전에 기대를 했으나 지상군의 참전은 시간이 걸렸고 하늘에선 공중폭격이 있었으나 지상과의 연락이 원할치 않아 국군에게 오폭을 하기도 하고 당시 평택역에 폭격을 하여 쌓아놓은 포탄더미가 폭발하고 국군들이 피해를 본다.
후퇴하던 국군은 UN군 산하의 미 육군을 보고 힘을 내기 보다는 실망을 한다. 이유는 국군의 장비나 미군의 장비는 별차이가 없었고 사거리가 긴편인(M101 105mm곡사포(기록상 한반도에서 가장 처음 쏜 대포)가 있었지만 이마져도 직접 보고 대전차고폭탄(HEAT)을 쏘았을 때만 효력이 있는데 그건 포병이 최후에 쓸 수 있는 수단이며 당시 가져온 포탄 1200발 중 6발에 불과했고 기상조건 또한 좋지 않아 항공기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웠고 약소한 병력으론 홍수에 강아지가 떠나려갈 정도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1950년 7월 5일 죽미령으로 올라온 전차와 선발대를 보고 산너머에서 미군의 포격이 실시 되지만 인마살상용의 HE(고폭탄) 으론 전차와 보병을 분리시킬 수 있겠지만 큰 효과가 없었고 북한군 또한 막강한 포병전력으로 죽미령 일대를 제압했다.
보병화기인 2.36"로켓포나 75mm무반동총 배속된M2 4.2"박격포(동란 최초의 사격으로 봄)로 화력을 퍼부었으나 끄덕하지 않았고 전차는 죽미령을 지나 오산읍내로 남하하고 미군은 공황상태에 빠지게 되며 북한군과 총격전을 벌이다 희생이 되고 지휘부는 당시 파견된 국군연락장교 윤승국대위의 조언에 따라 평택 쪽이 아닌 남동쪽 안성으로 후퇴한다.
남하한 전차와 직접 대결을 한 미52포병대대의 A포대는 몇대의 적전차를 돈좌 시키기도 했으나 밀려오는 북한군의 공격에 포를 버리고 후퇴한다.
오산 죽미령 전투는 세계최초로 UN군의 이름으로 미군이 참전한 격전으로 북한군의 주력을 일시 저지 했고 당시 일본과 미본토에 주둔하고 있던 지상군을 본격적으로 투입하게된 계기를 제공한 전투였다.
현재 서울방향 우측에 있는 커다란 참전비는 80년대 만든 것이고 좌측의 것이 원래 것은 59년도에 만든 것이었으며 5년50대를 전 기념관을 만들었으나 실물보다는 사진과 영상 위주이며 당시 운용한 것과 동일한 105mm 곡사포나 4.2"박격포 같은 실물이 (이유는 최초로 미군이 한반도에서 처음 사용한 장비라고 판단) 있어야 한다고 보며 국내에 동일한 장비가 전쟁기념관에 여러문 있다.
전시된 물품 중엔 7~80년대 우리나라 기술로 만든 국산제 105mm고폭탄 (HE) 한발이 전시된 것도 있고 안의 설명은 맞게 되어 있으나 이마저도 창에 설명된 표기가 대전차고폭탄(HEAT)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실외엔 이 전투와 전혀 관련 없고 후세에 만든 M48미군전차가 위장무늬 (동란기 땐 그냥 국방색)로 칠해져 있고 관련없는 구소련과 미군의 대공포도 야외에 있다.
기념관 측도 알고 있을 것이라 보는데 문제는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본다.
아무튼 관람객들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주신 학예사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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