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시는 수원을 포함한 넓은 생활 권역을 갖고 있는 넓은 곳으로 과거 사람들은 수원과 같은 지역으로 생각을 했으며 지금도 시내버스 같은 교통망은 수원을 중심에 두고 있다.
그러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수원의 서쪽은 남양군이었으며 지금의 오산시(과거 화성군청이 있었음)는 진위현이었다.
특히 남양군은 지금의 남양읍, 송산면, 마도면, 서신면, 비봉면, 매송면, 팔탄면, 향남면, 양감면등 해안을 끼고 있는 지역으로 갯벌과 섬이 섞여 서해안의 황해도 옹진부터 지금은 강화, 인천 시흥과 안산 그리고 안산이 된 대부도, 충남의 당진 서산과 연결이 되어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며 말투 또한 경기도 사투리를 쓰지만 특이하다.
남양군은 남양반도라는 툭 튀어나온 땅이 중국으로 향하는 물길과 연결되어 있어 교류가 많았고 남양홍씨라는 대성이 있는데 여기엔 토홍계가 있고 당홍계가 있으며 조선시대의 세도가로 알려져 있다.
일제 강점기 수원과 하나가 되지만 현재 남양읍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철도가 약간 비켜가고 도로가 지금의 군포에서 제부도 입구까지 건설되어 버스가 다니지만 정체되어 있었다.
그러나 큰 재해가 없었고 도시 근교농업과 수산업과 함께 낙농업등이 발달하면서 일반 농촌과는 분위기가 달랐고 이곳의 주민들은 인근 수원이나 더 멀리 서울로 자녀를 유학을 보낸다.
6.25 당시에도 큰 피해가 피해 갔다고 하는데 곳곳에는 오래된 집이 다른 지역보다 더 남아 있는 편이다.
서신의 정용래 가옥과 정용채가옥이 대표적이고 특히 기와집의 규모는 대단한데 그 만큼 경제적 능력을 자랑한다는 의미이다.
보통 영화를 보면 큰 기와집을 양반들이 소유하고 있는데 벼슬만 하고 경제적인 여력이 아주 대단하지 않으면 기와집에 거주하기 어렵고 대부분 초가집에 살았고 경제적으로 윤택해도 일반인이 기와집을 짓고 사는 건 서열과 권위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힘들었다.
흔히 유명한 이들의 생가라고 해서 기와집이 있지만 실제 현대에 와서 꾸며 낸 것이 많고 일반 가정집은 양반들도 대부분 초가집이었다.
이유는 기와집을 짓는 데 있어 재료의 무게가 많이 나가고 이를 받치는 주춧돌등 화강암의 확보가 중요한데 이는 왠만한 경제력이 없이는 추진하기 어렵기에 관청이나 향교나 서원, 사찰 그리고 공동의 비용으로 만든 재실을 제외하고 가정집에 기와를 올리기는 어려웠다.
남양반도 지역에 조선시대의 가정집이 남아 있다는 건 아마도 재력과 함께 그것을 받쳐줄 권력이 있음을 알 수 있고 개화기 때 이 집안의 상황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남양지역은 호남과 비교했을 때 큰 평야는 없지만 밭과 논이 골고루 있고 염전을 소유한 부자들 어선을 운영하는 이들도 있었다.
보통 중부지방의 집은 남쪽에서 봤을 때 ㄱ자를 돌려 놓은 구조로 마당이 남쪽지방에 비해 좁은 편인데 남양 정원채 가옥도 그러한 편인데 뒤의 경사지가 넓고 얕은 산을 등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