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통기타 음악의 공연장이었던 쎄시봉을 소재로 한 영화가 나온적이 있었다.
과거를 추억하고 오늘날 힘을 얻는 것은 좋은 일이라 본다.
70년대의 상징 청바지, 통키타. 생맥주는 당시의 시대를 설명하고 청년정신을 대변하는 상징물이다.
나는 송창식이나 윤형주 같은 트윈폴리오의 노래도 노래지만 결코 순탄치 않았던 그들의 경험이 그들에게 나름의 명곡을 부르고 만들게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일단 송창식과 윤형주는 훗날 이야기 하기로 하고 그들 보다는 후배들인 김민기 그리고 그 중 양희은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
어떤이들은 양희은의 남편은 김민기로 알만큼 친한사람(어떤이는 최불암의 부인이 김혜자로 알듯이) 이며 김민기의 소개와 그의 곡으로 가수의 연을 맺었다.
김민기가 대학생이었고 양희은은 재수생이었다. 그러나 노래가 좋았던 사람들은 서로의 잇속보다는 정서와 의리로 인해 밀어주고 땡겨준 것 같다.
두사람다 아버지를 일찍여위였고 (김민기는 유복자로 아버지를 전쟁때 북한군에게 잃음) 양희은은 중학생 때 아버지를 잃었는데 양희은의 집은 당시까지는 먹고 살만한 집이었으나 몰락했고 과도한 빚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양희은의 아버지는 북한에서 월남한 양정길은 국군의 창설에 기여한 인물로서 당시 당시 육사4기를 나왔으며 국군 특히 포병엔 북한에서 남하한 청년들이 많았으며 이들이 초기 국군의 주축이된다. 그리고 이들은 전쟁전에도 수많은 격전을 치루고 공을 세웠다.
특히 양정길은 포병대대장으로 6.25에 참전했고 훗날 대령으로 예편 서울 중심가인 가회동에서 출생했다.
고급장교였던 아버지가 제대한 후 잘 살았던 양희은의 가정은 아버지를 여이며 몰락했고 그녀는 생활을 위해 노래를 했고 학교는 웅변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하여 입학금이 면제된 서강대를 친구들의 과외로 도움을 받아 입학하여 다니다 가수라는 생업에 종사하느라 중간에 그만 두고 다시 재입학을 하여 다녔고 어렵게 졸업을 했다고 한다.
연예인이었지만 화려한 생활을 했을 것 같지만 늘 수수한 차림의 청바지와 기타를 들고 다녔는데 이는 학교와 밤무대인 직장으로 다니기 위한 방책이었다고 그녀는 전한다.
멋과 시대의 유행을 흉내낸 것이 아닌 생활인으로 어쩔 수 밖에 없는 선택이었다고 하며 대학엔 부족한 등록금으로 인해 장학금을 신청한 적도 있었다는데 담당교수는 직업가수인 그녀가 그리 어려운 생활을 하며 가수활동을 하는 것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고 한다.
시대의 아이콘이며 청년문화의 상징이었던 가수 양희은 그의 노래는 아름답고 멋지지만 남모를 고민과 사생활로 힘들어 했던걸 보면서 사는 모습엔 양면성이 있고 보여지는 것으로만 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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