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이야기

일본군의 용산주둔

lkjfdc 2023. 11. 23. 20:30

용산은 지금도 군사적 요충지지만 과거에도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면서 군대를 주둔 시킨 곳이며 그 자리는 비슷하지만 다른 곳으로 변했다.

크게 변화하지 않은 장소는 현재 용산중고등학교로 이곳은 구제 용산중학교가 있었으며 일본인 들이 많이 다녔고  일본이 물러 간후 다시 역사를 시작한다.

지금 전쟁기념관 자리엔  80년대 까지 육군본부가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땐 20보병사단 예하의  보병39여단 (평양주둔)예하의  78연대가 보병40여단(용산주둔) 예하의  79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평양 39 여단 예하 78연대, 용산 40여단 예하 79연대 라고 하는데 39본부가 평양에 있음에도 예하 78연대를 용산에 둔 건 전략상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아마도 78연대를 북쪽이나 남쪽 어디든지 출동 시키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이 부분은 연구를 해봐야 할 것이다.

크게 보면 20사단 예하이니 지휘권을 융통성 있게 써서 통제를 했을 것이라 보는데 현 전쟁기념관 자리와 바로 옆 미군시설물이 있는 넓은 자리는  보병 78연대와 79연대의 주둔지라 보면 되는데 담으로 구분되어 있고 어느 쪽이 78연대인지 79연대인지 알 수 없지만  바로 남쪽이 20사단사령부(현 국방부 자리 )였으니 사단의 명령을 전파하기 좋은 위치였고  우리나라 전방사단  처럼 실병력을 전선에 전개하기 보다는 예비사단 처럼 예하부대를  곁에 두고 즉각 출동할 수 있게 했고 당시 20사단의 전방은 압록강이고 19사단은 두만강이라고 보면 된다.



20사단은 당시 용산에 사단사령부를 두고(현 국방부 자리) 경부선 라인과 경의선 라인에 병력을 배치 했는데 위로 압록강 부터 평양 77연대,  서울 78연대. 79 연대,  대구 80연대  이런식이었다.

그리고 함경북도 나남에 19사단을 배치 했었다.

나남의 경우는 이북 지역에 주둔하여 병력을 배치했지만  중국 만주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군대였고 용산 못지 않은 병영도시였다.


두만강 부터 아래로 배치 했으며 내륙인 회령에도 보병 1개 연대와 사단 공병대대인 19대대(19사단을 지원하니 19대대라고 한 것 같다.)가 있었다고 한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당시 우리나라를 통제한 건 나남의 19사단 보다 용산에 주둔한 20사단의 역할이 크지 않았나 본다.



현재 미군들이 쓰고 있는 넓은 지역 용산고등학교 가는 길 남쪽 아래가 포병 26연대가 있던 자리로 보병부대 주둔지에 비해 넓고 막사의 간격이 넓은 편이다.

지금 서빙고 역 근처엔 기병 28연대가 있었고 건너엔 공병 20대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20사단을 지원하다 보니 20대대라고 한 것 같다.

지금의 용산역 앞에는 긴건물들이 줄지어 있고  뒤로는 총독관사가 있다.

아무래도 군과 관련이 있다고 보며 지금의 총독부로 출퇴근을 했던 것 같다.

지금 국립 중앙박물관 자리는 연병장이었고 상당히 넓다.
앞으로 넓은 지역에 아파트가 들어 찰 수도 있고 다양한 건축물이 들어 오기도 하겠지만 군사적인 기능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사통팔달 대륙으로 갈 수 있고 남쪽으로 태평양으로 갈 수 있는 지역인 용산은 철도교통의 요지이다.

그러나 중요시설이 모여 있어 기습적인 공격이 있을 경우 피해가 클 수 있다.



다양한  정책의 마련과 외교적인 노력을 꾸준히 하여 외세의 지배를 받거나 전쟁의 피해를 보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