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어릴적 뛰어 놀던 광주 경안

lkjfdc 2017. 7. 31. 11:28

 

 

 

 

 

 

어제는 일이 있어 광주(경기 광주)를 버스타고 다녀왔다.

 

거리상으로 얼마 되지 않지만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 보니 1시간정도를 잡아야 도착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 4차선이지만 70년대 중 후반만해도 길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

 

당시 아버지는 광주에서 용인으로 완행을 타고 다니셨다.

 

이상한게 용인에서 광주로 이사를 갔는데 본대가 있던 광주로 출근을 안하고 용인으로 다니셨고 당시 수원의 프랑스 참전비 토목작업과 영동고속도로 주변의 각종 토목작업을 하셨다.(아버지는 야전공병단에서 근무)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외출이 손자와 함께 간 수원지지대 고개의 프랑스 참전비였고 당시엔 그것이 마지막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불편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일반화 되어 있었다.

 

 

아무튼 광주에 도착 일을 보고 돌아갈 쯤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을 갔을 때 서울과 성남 그리고 수원과의 교통이 과거에 비해 잘 되어 있음을 실감했다.

 

아마 인구와 거리에 따른 왕래가 많아진 듯 한 것 같고 성남에서 여주까지 이어진 전철역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예전부터 있던 중국집에 가서 식사를 잠깐하고 용인으로 돌아왔다.

 

광주시장은 예전과 달리 덥개가 생겼고 편리해졌지만 크기는 작아진 느낌이었고 손님들은 여느 상설시장 처럼 드문드문 있었는데 아마도 마트나 인터넷 쇼핑의 발달로 손님이 없고 힘들다는 소리가 들린다.

 

시장 가운데 오래전 부터 '동해춘'이라는 음식점이 있었다.

 

70년대 당시 나는 인근의 '청화루' 집앞이라 자주 가서 먹었었다. 터미널 근처에는 '금문도'가 있었는데 당시에는 이름만 들었고 그 집 아들이 한살 아래라 같이 놀았던 적이 있었다.

 

당시 '금문도'라는 이름에 대해 멋지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이섬이 중국 본토에 붙어 있는 대만 즉 자유중국 즉 대만의 전초기지로 맹렬한 포격전을 한 곳임을 알았을 때 놀란적이 있다.

 

 

아마도 당시엔 중국본토 보다는 대만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본토에서 우리나라로 온 화교들도 대만과 관계를 지속했고 몸은 본토에서 왔는데 상호는 대만에 있는 산 '아리산'같은 지명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소읍인 광주엔 중국집이 여렀 있었지만 화교가 하는 중국집이 시내에 한 곳 있었다.

 

다른 중국집과 달리 식당안이 달랐고 각각의 방에 탁자가 있었다.

 

그땐 몰랐지만 커다란 액자에 '장제스'의 초상화가 있었고 정제된 느낌이었으며 시끌 시끌한 분위기의 식당이지만 뭔가 조용해야 하는 분위기라 그곳에 가면 이상하게 음식도 비싼 걸 시켜 먹었던 것 같다.

 

그집은 당시에 광주에서 유명했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데 그집의 아이들과 동네 아이들이 놀았었고 이름도 왠만한 아이들이 다 알았던 것 같다.

 

약 40년이 지나 가보니 다들 사라지고 이젠 '동해춘'만 남았다. 이곳도 실제론 주인이 두어번 바뀐 것으로 아는데 70년대나 지금이나 시장상인들이나 광주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영업을 했었던 것 같다.

 

당시 빈 그릇이나 냄비를 가지고 가서 짜장소스를 사다 먹는 동네주민들도 있었고 배달도 자주 시켰던 것 같다.

 

여러 중국집이 있었지만 나름 다 특성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동해춘'을 보면 그들 나름의 매력과 음식맛이 있지 않았나 생각해보며 지금도 그곳을 빌려 회식을 많이 한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아무튼 세월이 지나도 많은 사람들에게 음식도 팔지만 추억 또한 공유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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