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전 초기 우리 포병에겐 M 101 105mm 위장무늬 곡사포는 없었다.
그저께 집으로 '육군지'가 배달되어 왔다.
대군인 육군이 만든 대표 잡지이며 과거에 비해 그림이 많고 내용이 간단명료하다.
과거의 육군지는 군에서 발행은 했지만 시사교양에 대한 것이 많았고 민간 잡지에 비해 내용도 알찼다.
지금은 부담없는 내용으로 인터넷에서 볼 수 있다.
중대급 단위부대 까지 내려보내며 간혹 큰부대 행사에 가면 배부해 준다.
이번 기사에 한 포병장교의 글이 올라왔다.
내용은 동란시기 북한인민군의 강력한 전차부대에 대응 곡사포를 직접조준하여 격파하고 자신은 부대원과 전사한 '고 김풍익'중령에 대한 것과 1980년대 후반 고 김중령의 일대기'내 젊음 조국에!'를 펴내서 그 수익으로 의정부 축석령에 기념비와 공원을 만들었던 내용으로 세월이 지나 다시 재조명하고 당시 나왔던 책을 재발간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지금까지도 북침이니 남침이니 해서 대한민국 국군이 북으로 쳐올라 갔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고 관심조차 없는 경우가 많은데 '고 김풍익 중령'이 전사한 의정부전투를 안다면 얼마나 우리군이 빈약한 장비를 가지고 강군인 북한군과 맞서 싸웠고 당시 정치권이 그리고 군 수뇌부가 대책없이 국방정책을 수행했는지 알 수 있다.
육군의 포병병과에서는 당시 빈약했지만 훈련받은 대로 싸우고 서울로 향하는 북한군을 저지한 포병부대를 기리고자 김풍익 중령을 조명했었고 이는 어쩌면 '평화를 원할 수록 전쟁에 대비하라.'는 교훈을 다시금 알리고자 했던 의도가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아무튼 성장하는 포병의 모습을 보여주고 군장병들의 적극적인 모습을 표현한 내용이었다.
다만 아쉬운 건 기사내용에 첨부된 사진을 올리는데 신경을 썼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 김풍익 중령이 그리고 그 당시 우리 포병이 북한군과 싸울 때 갖고 있던 동일한 장비 M 3 105mm곡사포 는 경남 사천에 딱 1문 남아있고 (지갑종 선생이 기증) 사진에 나오는 위장무늬 M101 105mm는 개전 초기 우리군에는 없었고 (이것과 155mm지원해 달라고 미국에 요청했지만 미군은 전쟁이 일어날까 지원을 해주지 않음)당시엔 미군도 위장무늬를 한 대포는 없었다.
사진을 선택함에 있어 105mm곡사포 사진을 개전초기의 것으로 했었으면 더 훌륭한 기사가 될 수 있고 전쟁기념관에 있는 동란시기의 곡사포의 위장무늬와 국산바퀴는 변화를 줘서 전시했으면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동란초기 우리군인 장비한 105mm곡사포는 M3 이며 당시의 장비엔 위장무늬가 없었음을 강조한다.
사진에 나오는 사진은 전쟁기념관에 있는 M2(M101) 105mm곡사포 사진으로 개전초기 우리군이 사용한 것이 아니며 당시엔 위장무늬가 없었다.
동란시기 M2(M101 )곡사포를 처음 사용한 군대는 미군이며 오산 죽미령에서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