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동기들과 연락이 되었으나
초등학교 친구들의 근황을 40년만에 알게 되었다.
그렇게 먼곳에 사는 것도 아니었는데 여러가지 사정 때문에 만날 수 없었다.
40년만에 전화를 통해 확인한 어릴적 친구의 목소리는 음색만 약간 변했지 말투는 여전했다.
'야! 놀러와...' 와 함께 다른 어떤 말이 필요 없었다.
초등학교 동창들의 밴드도 방문을 하고 졸업앨범의 사진도 볼수 있었다.
초등학교의 대부분 시간인 5년을 다녔기에 난 당시 친구들이 무척 궁금했다.
서울근교의 초등학교다 보니 일반 소읍과는 달리 농업보다 상업이나 공직자 자녀의 비율이 높았고 들고 나는 학생들이 많아서 중간에 전학을 가거나 오는 경우가 많았었다.
이유는 군부대가 있어 군인가족 특히 장교의 자녀들이 이동을 했었고 그리고 부모의 생업 때문에 서울이나 인천 갑자기 생긴 성남등으로 갔다 다시 오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중학교 부터는 시내의 학교를 보내기 위해 서울로 전입을 하고 뭔가 조금있거나 가족이 서울에 사는 집은 서울로 전학을 갔다.
나처럼 시골로 이사를 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그만큼 당시 내가 살던 곳은 중등교육의 못마땅 함과 대학이라는 것 까지 생각한 부모들의 열망이 강했던 곳이었다.
먹고 살만한 집은 어쨌든 대처로 나가 뭐가 되는 걸 꿈꾸었던 시절이고 생각보다 경기도에서 수원을 빼면 2000년대 초중반 까지 비평준화 정책으로 인하여 고등학교 입학에 많은 노력과 돈을 써가며 극성을 떨었던 것이다.
지방의 20대 도시보다 학생들의 고등학교에 대한 차별과 선입관이 심했고 1000만에 가까운 경기도민은 30년 아니 서울 같으면 50년 전에 사라진 비평준화라는 기준에 힘들어 했었고 일단 뭔가 된다고 생각하면 극성을 떨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그안에서 이사를 가지 않고 선택을 하겠지만 읍이나 면의 경우는 도시의 학교를 보내기 위한 노력이 처절했다.
문제는 안양이나 일산같은 시의 경우 사교육의 대부분이 거의 고등학교를 보내는데 시간을 투자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면이나 읍의 고등학교가 반 입시학원처럼 공격적 마케팅을 하여 시내의 학생을 유치하고 대학진학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게 뭘 하자는 건지 ? 결국 공부를 못하거나 학습의욕이 없는 학생들은 예나 지금이나 동네북이고 그냥 꿔다논 보리자루이며 별 문제 없이 졸업만 하면 되는 것이 된다.
아무튼 나의 초등학교 시절 친구가 궁금해 앨범사진을 봤을 때 의문시 되는 부분이 생겼었다.
집이 좀 살거나 읍내에서 돈 잘벌던 전문직 부모를 둔 아이들은 앨범에 없었고 또한 서울로 갑자기 전학간 학생이 늘었고 또 대부분의 반은 60여명 가까이 있는데 딱 한반 20여명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1/3 가량이 나와 짝이 었고 노는데 정신이 팔렸던 녀석들이었다.
공부를 못하고 부모가 농사를 짓거나 영세민 아니면 집에서 신경을 덜 쓰는 학생들을 따로 관리하여 교장의 지시로 특별반을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엔 반 안에서도 성적에 따라 분단을 나누고 저학년 때는 나머지 공부도 시키고 (물론 나도 공부를 못하니 단골이었다.)그러나 졸업할 무렵 특별반을 만들어 떡하니 졸업앨범에 등장을 시킨건 아무리 생각해도 학생들의 미래나 자질 그리고 대인관계는 생각하지 않은 비교육 처사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만약에 기초학력이 부족했다면 다른 조치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특별한 ? 반의 친구들은 지금도 동창회에 나오지 않고 같은 지역사회에 살고 있어도 연락이 안 된다고 하는데 그 친구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다.
학교라는 조직이 행한 잘못된 조치가 분명하며 이런 것이 있어야 했는지 당시 어른들에게 묻고 싶다.
지금도 당시의 관계와 보이지 않는 서열? 로 상처 받고 끼리 끼리 만난다는 느낌이 있고 어른이 되서도 오래 간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축소판을 보는 것 같았고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것에 따른 차별이 너무도 빨리 학생들의 앞날을 재단한 것이 아닌가 씁쓸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