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이사를 다니면서 느낀 도시와 농촌

lkjfdc 2021. 4. 9. 10:54



40여년이 넘었다.

나의 집은 경기도에서 충청북도의 작은 면으로 이사를 가서 2년을 살다 인구 10여만의 도시로 이사를 갔다.

당시 시골 초등학교와 시골중학교에서의 생활은 좋은 부분도 있었으나 특유의 배타성과 위아래를 강조하는 분위기 그렇다고 그것이 꼭 엄격하지 않았다.

농사를 주로 하는 특히 동족촌이 몰려있던 시골은 소문도 빨랐고 말들도 많았다.

아랫녁이 고향인 아버지 농촌출신이지만 젊은 시절을 군에서 보낸 분이라 이질적인 분위기에 힘들어 하셨던 것 같고 어머니 또한 이웃 고을이 친정이지만 객지와 다를 것이 없었다.

물론 근처에 같은 종씨가 있어 친근함은 있었으나 다수가 아니다 보니 지역에서는 목소리를 낮추고 살아야 했다.

일반적으로 예의를 따지고 질서를 따지는 것 같았지만 여기에서도 재산이나 학벌 그리고 과거의 신분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부분이 달랐고 한번 찍히면 동네에서 자리 잡고 사는것이 쉽지 않았다.

특히 10대 중후반 선배들을 보면서 나도 그렇지만 어른들도 도시로 나갈 생각을 하셨다.

일단 농사를 짓는 땅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어머니가 작은 가게를 하셨는데 일찍 접고 이사를 결심했었다.

당시 시골중학교에서 도청이 있는 곳으로 학교로 갈 확률은 20% 그리고 소도시로 갈 확률은 대도시 포함 60% 정도 도시로 간다해도 절반은 전문계고 였고 나머지 40%는 인근 읍으로 고교를 갔는데 공부나 취업을 떠나 전반적인 분위기가 거칠었고 고향에 남아 중 고등학교 시절 부터 음주와 흡연 그리고 패싸움도 있었다.

그리고 객지에서 공부하다 집으로 오는 선후배들과 충돌하고 시끄럽지만 동네에서는 쉬쉬하고 조용했었다.

지금같으면 형사처벌이 될 수 있지만 합의를 보고 좋은 게 좋다고 넘어갔다.

때문에 일찍 부터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도시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고 고향을 떠나 드라마에 나오는 삶을 동경했다.

나는 나대로 원래 살던 곳이 읍내다 보니 시골의 정서와 선후배 관계가 어색했고 적응하는데 힘도 들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폭력과 집합 때로는 협박도 있었기에 내가 살던 경기도 광주나 용인이 그리웠었다.

중학교 때 전학을 한 소도시의 학교는 농촌인구가 있긴 한데 평균학력 부터 수업에 접근하는 방법이 달랐고 적극적이었다.

물론 시골보다 더 큰 폭력이 도사리고 있었으나 그 빈도는 덜했고 원래 살고 있던 이들 보다는 시골에서 유학을 오거나 방을 얻어 자취를 하는 학생들에게 발생할 확률이 높았다.

도시로 나왔다고 다 좋았던 것도 그렇다고 다 나 나쁜 건 아니었다.

단지 공부를 하는 학교는 해야할 교육과정이 있고 환경미화나 작업, 학생자치회 그리고 외부에서 부탁하는 자잘한 작업들은 줄여야 했다.

기초학력을 이수하게 하여 중등학교에서 어느 정도는 학력을 높여주고 대학을 보내 고등교육의 이수를 양적 그리고 질적으로 높여 훗날을 도모해야 했다.

당시 선생님들은 특히 시골학교의 경우 수업이외의 행정업무 이외에 학교가꾸기 그리고 실습지( 말이 실습이지 학교운영비 마련을 위한 공간) 관리 그리고 생활지도에 바빴다.

또한 지역사회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리고 농촌 청소년들의 경우 남아 있는 선후배들 보다 소수의 금의환향하는 선배들을 보고 다수 도시로 올라간 이들의 뒷 모습은 잘 알지 못했다.

지금은 아예 이농현상이 심화되어 시골에도 청소년들이 적다.

현재 내가 있는 용인시의 경우 도농통합시다 보니 과거의 내가 살던 모습이 비슷하게 투영이 되는데 농촌과 도시의 장점이 부각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목격하는 모습은 단점도 많다.

내가 이곳에서 해 줄 수 있는 일은 바로 도농간의 학력격차를 조금이라도 해소하고 꼭 고향을 떠나지 않아도 되는 청소년들이 늘어 나길 바라며 공부는 조금 못하거라도 꿈을 잃지 않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