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의 하드한 음악 빠르고 크고 무거운 음악을 처음으로 시도한 세대는 70년대 전후에도 있었으나 실제 레코드와 방송을 통해 시도하고 윗분? 들이나 어른들을 불편하게 했던 시대가 본격적으로 나온 건 80년대 중반이다.
그냥 막 나온 것이 아니고 공연장이 준비되고 이 시끄럽고 엄청난 음향을 감당할 관객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이들에게 퍼포먼스?를 보여줄 청년들 보다 윗세대 요즘으로 보면 아저씨들이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겁없는 청년의 선두가 시나위나 부활이었다면 현장에서 산전수전을 디 겪고 서울이나 지방할 것 없이 부르면 가서 공연을 했던 그 아재들의 중심에 유현상이 있었다.
물론 그전에 검은나비나 여기에서 이어진 불나비 사랑과 평화라든가 라스트찬스가 있었지만 이들은 방송보다는 나이트클럽이나 미8군 기지촌 아니면 주한미공군의 기지촌에서 연주를 하고 생계를 유지했는데 동두천(당시엔 포천)이 고향인 유현상은 미군기지촌의 환경과 그 분위기에 영향을 받고 미국의 팝과 그들의 문화를 부러워 하고 음식을 먹어도 미제를 애용했고 그들을 동경했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밤무대를 전전하면서 꼭 외국의 것을 흉내낸 것이 아닌 나름의 정서와 소리로 자신의 개성을 찾아 노래를 만든다.
지금은 가수로 알려져 있으나 과거엔 소문난 기타주자였고 작곡도 하여 다른 가수들에게 주었고 80년대 중반 쯤엔 자신의 개성을 살린 음반을 발표한다.
성인들이 요구하는 스타일의 노래도 만들지만 자신이 하고 싶어했던 노래를 당대 실력있는 연주자들을 참여시켜 발표하는데 그 연주자들 중엔 86년 백두산의 기타연주자가 되어 같이 활동을 하는 '김도균'이 있었다.
유현상이 백두산을 만들 당시 본인은 한발 떨어져 가수를 담당할 사람을 원했으나 결국 본인이 무대에 섰고 1집이 당시 만든 것과 예전의 것을 쎈음악으로 발표한 대신 2집은 영어로 된 가사를 본격적으로 도입 판매를 하고 연주곡도 넣었으나 당시 공연장에선 불리지만 방송과는 인연이 없었다.
85년 나온 음반은 백두산이 탄생하기 바로전 나왔는데 백두산0.5집 정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고 유현상이 당시 추구하는 음악성향이 어떤지 알 수 있다.
공연장에서 말보다는 연주와 노래만 하는 과묵한 연예인이었고 어른들은 메탈음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은 걸 안다고 했고 그러면서도 성인들이 어떤 음악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훗날 백두산이 해체된 이후 트로트가수로 변화히는데 메탈매니아나 락을 좋아하는 이들은 이걸 배신이라 했었으나 당시 그의 현실은 녹녹하지 않았고 생활인이었기에 아티스트보다는 연예인이 되고 웃끼는 이야기 잘하는 아재가 되어야 했다.
실제 그의 연주를 보면 웃음보다 진중함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의 자부심이 강하고 왜 밴드 이름을 백두산이라 했는지 알 수 있고 그냥 허언이 아니고 큰 열정과 피나는 연습으로 이뤄낸 결과임을 알 수 있다.
남이 연주라고 공연하는 걸 쉽게 이야기 하고 우리나라의 메탈음악은 본고장보다 수준이 낮고 들을게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척박한 현장에서 자신의 길을 꾸준히 가면서 나름의 정체성을 갖고 당시 서른이 넘어 10대와 20대의 열정을 표현하고 앞장선 유현상 그리고 백두산은 당대의 선각자라 말하고 싶다.